대한민국 중심에서 다시 쓰는 농업지도<3>
잦은 비와 병해로 기존 작물 '한계' 봉착
아삭하고 달달한 맛 뽐내는 '과일의 왕’
농업의 미래, 열린 태도와 기술 공유에
▲ 충북 제천시에서 딸기와 듸냐를 재배하는 유명한·이서은씨.기후변화가 바꾼 농업 현장은 농업인들의 실험실이 됐다. 뜨거워진 기온, 극한 강수 등 이전과 달라진 날씨에 농민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색다른 도전에 나섰다.
충북 제천의 한 농가 비닐하우스에서는 낯선 과일 듸냐가 자란다. 수박과의 아열대 작물로 주로 중앙아시아의 고온 건조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과일이다. 수박처럼 아삭하고 멜론처럼 달달한 맛을 뽐내며 현지에선 ‘과일의 왕’이라고 불린다.
제천시는 변화하는 기후와 농업환경 변화에 맞춰 지난해부터 듸냐 시범 재배사업을 추진했다. 현재 6개 농가가 작목반을 구성해 이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 듸냐
▲ 듸냐
▲ 듸냐
제천시 모산동에서 ‘초록길딸기농장’을 운영하는 유명한·이서은씨(42) 부부도 그중 하나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듸냐 재배에 뛰어들었다. 그 배경에는 새로운 작물에 대한 호기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공존했다. 변화하는 환경과 현실에 맞춰 작물과 재배 방법도 바꿔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들은 겨울에는 딸기, 여름에는 수박을 재배해왔지만 몇 해 전부터 기존 여름작물의 한계를 실감했다. 도내에서 가장 서늘한 지역으로 꼽히는 제천마저도 최근 몇 년 사이 더위가 극심해지고 고온다습함도 심화하며 농사 환경이 급격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유 대표는 “겨울에는 스마트팜으로 딸기를, 여름에는 노지 수박 농사를 지었는데 국지성 호우가 잦아지고 습도도 높아지면서 병이 많이 생겼다”라며 “작황이 불안정해져 다른 작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특히 2023년에 큰 손해를 봤다. 잦은 비에 애써 키운 열매가 물러 거의 수확을 하지 못했다.
그는 “농사 30년 경력의 아버지도 수박 농사에 실패하는 걸 보고 작물 전환의 필요성을 절실히 체감했다”라고 토로했다.
이때 농업기술센터의 ‘아열대 작물 재배 교육’을 통해 접한 것이 듸냐였다. 생육 시기나 재배 방법이 수박이나 멜론과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관심을 두게 됐다.
이 대표는 “새로운 작물에 대한 관심이 많아 애플수박, 망고 수박 등 여러 품종을 시도했다”라며 “수박과 닮은 점이 많아 적응이 빠를 것 같았고 해마다 바뀌는 날씨를 생각하면 필요한 선택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주변의 우려도 컸다. 특히 고령 농민들은 “그런 걸 심어서 어디에 쓰냐”, “생소한 작물은 팔 데가 없다”라며 걱정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이런 말들을 동력으로 삼았다.
기후변화는 작물 선택뿐 아니라 농사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었다. 이들은 기존 노지 재배를 접고 시설재배로의 전환을 택했다. 딸기는 스마트팜에서, 듸냐는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고 있다. 초기 투자비는 만만치 않았다. 토지 매입과 하우스 설치, 비닐 교체 등 시설 조성에만 약 2억5000만원이 들었다. 듸냐 하우스에는 아직 자동 냉·난방 시스템은 아직 없지만 단계적으로 보완할 계획이다.
유 대표는 “이제 노지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매우 힘든 시기가 됐다”라며 “비용이 많이 들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농사 방식도 달라져야 할 때가 됐다”라고 설명했다.
새 작물을 재배하는 일은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은 어떤 작물이나 마찬가지지만 듸냐처럼 생소한 품종은 몇 배의 노력과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사실상 재배 매뉴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농업기술센터와 듸냐 재배 농가들이 직접 데이터를 쌓으며 기술을 정립하고 있다. 유 대표와 이 대표도 언제 비료를 줘야 하는지, 언제 수확해야 하는지조차 경험으로 익혀야 했다. 지원받은 씨앗이 기존 농가들이 재배하던 중·소과종이 아닌 대과종이였는데 국내에서 처음 재배되는 품종이라 정보가 거의 없었다. 완숙 시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정도다. 익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맛본 열매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결국 첫해 수확량은 40%에 불과했다. 시의 지원이 있었기에 손실을 감수하며 도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개인 투자만으로 시작했다면 저조한 수확량 앞에서 농가의 도전도 멈췄을 가능성이 크다.
듸냐는 현지에서도 품종이 10여 개에 달한다. 한국에 도입된 것은 모두 3개다. 중과종과 소과종은 16브릭스가 넘는 높은 당도를 갖고 있다. 대과종은 아직 연구와 기술 개발이 더 필요한 품종이지만 온라인몰에 올리는 족족 팔렸고 판촉 행사 이후에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직 현지에서 생산되는 만큼의 당도를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제천에서도 재배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판매는 주로 직거래·온라인몰·로컬푸드 매장·관광지 매장을 통해 이뤄진다. 시의 홍보 지원 덕분에 소비자 인지도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다만 아직은 듸냐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농가는 없다. 재배기술이 완성되지 않았고 안정적인 판로 확보도 과제로 남아있어서다. 다른 농가들 역시 타 작물 재배를 병행하며 시범 재배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유 대표와 이 대표는 내년에는 수확량은 60~7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대과종뿐만 아니라 당도가 우수한 중과종도 도입해 재배 면적을 늘릴 예정이다. 품질을 높이기 위해 차광시설과 환풍기 등도 설치한다. 추후 체험을 도입해 소비자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이들의 도전은 단순히 새로운 작물을 실험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농업의 현실적 실험이다. 농촌의 고령화는 심화하고 있지만 청년의 유입은 미미하다. 기후변화까지 겹치며 전통적인 재배 방식도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농민들의 시도는 농업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들은 위기 돌파의 핵심으로 농업인들의 열린 태도와 기술 공유를 꼽는다. 농업인들 간 활발한 정보 교류와 새로운 기술을 배우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문제는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작물이나 기술을 도입할 때는 적지 않은 자본이 필요해서다. 특히 기반이 부족한 청년 농업인은 부담 때문에 쉽게 뛰어들지 못한다. 따라서 정부와 지자체가 보조사업 등 정책적 지원으로 초기 투자 부담을 덜어주고 판매·유통까지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체계가 구축돼야 농업이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듸냐 재배는 아직 초기 단계입니다. 매일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기후변화 시대 농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죠. 장기적으로 볼 때 농업은 바뀌어야 삽니다. 기술 개발과 정책 지원, 안정적인 판로 확보 등 이 세 가지가 있을 때 지속가능한 농업의 미래가 열릴 것입니다.” /박장미·조은영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