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남궁창성 강원도민일보 상무이사 겸 미디어실장] 수정헌법 수호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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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025-11-24 09:38본문
“여러분!! 국무부는 공산주의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산당원으로 국무부에서 일하며 정책을 만든 자들 205명의 이름이 제 손에 들려 있습니다.”
1950년 2월9일. 미국 위스콘신주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1908~1957년)가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서 말 폭탄을 던졌다. 후일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명명된 마녀사냥의 총성이 울린 것이다.
매카시는 재선 출마가 임박해 왔지만 지지 기반이 약했다. 탈세와 윤리위반 혐의로 당국의 조사까지 받고 있었다. 당선을 위해 그는 반공(反共)을 이용했다.
1949년 중국 대륙의 공산화와 소련의 원폭실험 성공은 자유진영에 충격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는 반공주의로 진화하고 있었다. 한 달 전 국무부 관리 엘저 히스가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소련을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그 충격은 더했다. 전시 경제가 끝나며 파업과 노동 쟁의가 빈발했다. 보수진영은 불순분자,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조사위원회는 공무원, 군인, 언론인, 지식인, 영화인을 마구잡이식 청문회에 세우고 강압 조사를 벌였다. 광풍이었다. 반공과 안보라는 소리에 모두가 납짝 엎드려 숨을 죽였다. 의혹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내몰렸다. 직장을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됐다.
마녀사냥은 지속될 수 없었다. 매카시가 육군에도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하자 진실을 놓고 정면 충돌했다. TV로 청문회가 생중계되면서 매카시의 고압적이고 무례한 태도가 역풍을 맞았다. 근거 없는 주장은 진실을 마주할 수 없었다. 미 상원은 1954년 12월 매카시에 대해 견책 결의안을 채택했다. 정치적 파문(破門)이었다.

▲ 1947년 수정헌법수호위원회에 참가중인 영화인 등이 워싱턴 D.C.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 라이프지 인용
암흑기, 진실의 횃불을 들어올리며 헌법을 지켜낸 시민들이 있다.
‘수정헌법 수호위원회’(Committee for the First Amendment)다. 부당한 정치 압력과 언론 탄압에 맞서 수정헌법 제1조, 언론·출판의 자유를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광풍 속에서 할리우드 인사들도 공산주의 동조자로 매도됐다. 배우 헨리 폰다가 위원회 설립을 주도했다. 동료 험프리 보거트, 가수 겸 배우 프랭크 시내트라 등이 진실의 광장에서 매카시즘을 단두대로 처단했다.
그리고 80년이 흘러 미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수정헌법 수호위원회’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언론탄압이 노골화되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 거세지자 재출범한 것이다. 위원회는 언론탄압 감시 등 표현의 자유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헨리 폰다의 딸, 제인 폰다가 위원회 재출범을 주도했다. 배우 메릴 스트립, 나탈리 포트만, 줄리언 무어,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이 참여했다. 550여 할리우드 인사들이 지지 의사를 밝혔다.
위원회 재출범은 지난 10월 미 ABC 방송의 지미 키멀 라이브 쇼 중단이 발단이 됐다. 진행자 키멀이 보수우파 청년 암살과 관련해 트럼프를 비판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방송사 프로그램이 트럼프를 공격하는 것뿐이라면 면허를 박탈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협박하고 나선 것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21세기 백주 대낮에 버젓이 횡행하고 있다.
“매카시 시대는 정치적 스펙트럼을 달리 했던 모든 미국인들이 힘을 합쳐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면서 종말을 고했다. 오늘 다시 그 세력이 돌아왔다. 우리가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설 차례다.”
아버지 헨리 폰다가 걸었던 길을 다시 찾아 나선 여든 일곱 제인 폰다의 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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