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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칼럼-이진우 매일경제 논설실장] 공장 대이동의 시대, 한국은 스스로를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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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6회 작성일 2025-09-0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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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치열한 공장 쟁탈전
트럼프는 공장 살리기 집착
한국은 되레 공장 등 떠밀어
'국부의 심장' 훼손 멈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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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폭격의 개념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완전히 정립됐다. 목적은 적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뿌리째 마비시켜 전쟁 자체를 끝내는 데 있었다. 그래서 병영보다 공장을 먼저 때렸다. 창시자 격인 줄리오 두에는 이미 1920년대에 적국을 굴복시키려면 군 병력이 아니라 공장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벌이는 경제전쟁의 본질도 같다. 견제 대상인 중국의 공장을 때리고, 미국 공장은 보호한다는 것이다. 단 폭탄 대신 관세와 무역규제가 날아갈 뿐이다.

지난주 미국 상무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 내 반도체 공장에 미국산 장비를 들여올 때 개별 허가를 면제해주던 제도를 내년부터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중국 내 생산 기반을 황폐화시키는 조치다. 트럼프 전략과 맞아떨어진다. 한국 기업의 피해쯤은 그저 '콜래트럴 대미지(부수적 피해)'로 간주됐을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엔비디아와 AMD 등 미국 팹리스 반도체 업체에는 중국 수출을 허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간다. 미국 내 조립 공장이 아른거렸을 것이다.

트럼프 정책의 대부분은 결국 공장으로 귀결된다. '제조업 르네상스'라는 거창한 구호도 따지고 보면 공장 이야기다. 트럼프노믹스 설계자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고문이 "최종 게임은 디트로이트와 중서부 지역의 반쯤 비어 있는 공장을 꽉 채우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미국 재계의 양대 골칫거리였던 인텔과 보잉을 다루는 방식도 흥미롭다. 


인텔에 대해선 89억달러 보조금을 지분 10%와 교환하는 방식으로 미 정부가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부실 원흉인 파운드리 부문 매각은 계약으로 막았다. 보잉에는 외국 정부를 압박해 1000대에 육박하는 항공기 수주를 몰아줬다. 한국의 대한항공도 103대를 보탰다. 지난 3월에는 미 공군 차기 전투기 사업자로 보잉을 선정해줬다. 이 정도 밀어주면 어지간한 경영 리스크는 돌파가 가능해진다. 메시지는 심플하다. "인텔과 보잉의 공장은 멈추지 않는다."

시선을 국내로 돌리면 상황은 정반대다. 석유화학·철강산업 구조조정이 발등의 불이지만 누구나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중국과 경쟁하는 산업 전반이 잠재적 위험군이다. 게다가 미국과의 관세협상 후폭풍도 곧 닥칠 태세다. 그러나 위중한 순간에도 정치권은 열심히 제 발등을 찍는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제로 자영업자가 와르르 무너진 것을 보고도 이번에는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협력업체가 많은 공장들이 직격탄을 맞을 것이다.

잘못 손댄 법의 부작용은 보통 3~5년 뒤 확연해진다. 국내 공장들의 집단 해외 이전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가 메인 공장을 미국으로 옮긴다면 한국 경제는 어떤 모습일까. 감당할 수 있을까. 공장을 옮길 여력마저 없는 중소기업은 아예 문을 닫을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공장을 착취와 소외의 공간으로 봤다. 그러나 조지프 슘페터의 관점은 달랐다. 그는 여왕만 누리던 실크 스타킹을 자본주의 덕분에 공장 여공도 신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런 혁신의 무대가 공장이다. 국부(國富)의 심장은 중앙은행이 아니라 공장이다. 바야흐로 공장 대이동의 시대다. 세계는 공장을 지키고 빼앗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그러나 한국은 오히려 자국 공장을 맹폭 중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불러올 씨앗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는 선동'을 지목했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건재하지만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그의 경고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이진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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