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감사 칼럼- 김창균 조선일보 논설주간] "졌지만 잘 싸웠다"가 착각인 세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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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회 작성일 2025-07-24 15:19본문

당초 승산이 희박한 대선이었지만 실낱같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국민의힘이 ‘탄핵 반대’ 후보를 내세우는 순간 그 확률이 0%가 됐다. 계엄에 놀라고 분노한, 그래서 탄핵 찬성이 70%를 오르내린 민심에 역행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확인된 대선 표심에도 어깃장을 놓고 있다. 패배 목적지로 향했던 진로를 그대로 되밟아 간다. 탄핵에 반대한 구 주류를 새 지도부로 선택했다. 눈속임용 화장을 위해 세웠던 안철수, 윤희숙 혁신위의 요구는 모두 묵살했다. 탄핵 민심을 어지럽힌 아스팔트 우파를 새 피로 수혈했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와 탄핵 반대 깃발을 쳐든 주자가 8월 전당대회를 선도하고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국민의힘 행로는 ‘졌지만 잘 싸웠다’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대선 패배 때문에 노선 변경을 할 필요가 없다는 핑계로 작용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졌잘싸’는 착각이다. 얼핏 생각해도 세 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무엇보다 49.4% 대 41.1%로 패배한 결과는 결코 선전(善戰)으로 평가할 수 없다. 개표 당일 출구 조사 결과는 51.7% 대 39.3%로 앞 자릿수가 두 단계 차이 났다. 실제는 승자, 패자 모두 40%대로 나와 예상 밖 접전처럼 비쳤다. 500만표 차 패배가 나올 수 있다는 최악의 전망에 비해 289만표 차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득표율 8.3%p 차는 대패 또는 참패로 분류해야 옳다.
2020년 4월 총선 때 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지역구 253곳에서 이룬 총득표율은 49.9%와 41.5%였다. 득표율 차는 8.4%p로 이번 대선 8.3%p와 거의 일치한다. 당시 지역구 승패는 민주 163 대 미래통합당 84로 더블 스코어였다. ‘졌지만 잘 싸웠다’고 자위하고 이번 대선처럼 다음 총선을 치르면 200석 대 100석 참패가 기다린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 그대로 선수들이 박수 받을 만한 활약을 했을 때 쓰는 말이다. 국민의힘의 대선 플레이는 탄핵 반대 깃발로 치른 선거 전략, 막판 황당한 후보 교체 해프닝, 윤석열 전 대통령과 끝까지 선을 긋지 않은 후보의 고집 등 모든 면에서 낙제점이었다. 보수 유권자들은 국민의힘에 실망을 넘어 분노까지 느꼈다. 그런데도 투표장에 몰려나와 국민의힘에 표를 보탰다. 국민의힘 득표가 예상을 웃돌았다면 당과 후보 덕이 아니라, 이재명 대통령 당선만은 막아야 한다는 보수층의 절박함 때문이었다.
또 ‘졌지만 잘 싸웠다’는 다음엔 좀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때 쓰는 표현이다. 자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을 때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 성적표는 국민의힘이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서 얻은 결과였다. 지역별 투표율에서 대구 80%, 광주 83%로 박빙이었다. 부산, 울산, 경북, 경남 등 다른 영남권 투표율도 호남과 큰 차이가 없었다. 역대 선거에서 호남이 영남보다 득표율이 제법 높았고, 참패가 예상되는 진영은 투표율이 떨어진다는 이치에 비춰볼 때 의외였다.
나라 경제가 노동, 자본 같은 생산 요소를 최적으로 활용해서 달성할 수 있는 성장률 최고치를 잠재 성장률이라고 부른다. 국민의힘 후보의 이번 득표율은 보수 진영이 총결집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잠재 득표율이었다. 마른 수건 짜내듯 보수 지지층이 마지막 한 명까지 투표에 참여했다. 국민의힘이 전략과 출전 선수를 바꾸지 않는 한, 이번 대선보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선거에 진 국민의힘은 “졌지만 잘 싸웠다”고 뭉개고 있는데, 선거에 이긴 이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심을 누그러뜨리려 신경 쓰고 있다. 이대로라면 국민의힘의 다음 선거 결과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치를 하나하나 따져 보면 ‘졌지만 잘 싸웠다’가 얼마나 근거 없는 허상인지 알 수 있다. 선거판 읽는 선수들인 국민의힘 의원들도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졌잘싸’는 핑곗거리일 뿐 속으론 다른 주판알을 굴리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 당이 살려면 계엄을 감싸고 탄핵에 반대한 종전 방침을 갈아엎는 쇄신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자신들의 공천이 보장되는 당 구조도 함께 위협받는다. 반면 종전 노선을 밀고 나가면 당은 계속 죽을 쒀도, 현역들의 지역 기득권은 보전된다. 지금 살아남은 의원들은 탄핵 반대 지지층이 여전히 다수인 영남과 수도권 강남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당은 망해도 나만 살아 남으면 된다”는 이기심이 ‘졌잘싸’ 구호 뒤에 몸을 감추고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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