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강윤경 부산일보 논설주간] 원전 해체, 끝이 아닌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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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025-07-23 11:36본문
논설주간
원안위 고리 1호기 역사적 해체 결정
500조 원 글로벌 시장 참여 교두보
원전 산업 전 주기 기술 확보 큰 의미
산업생태계 조성 안전이 전제 조건
민관 협력 통해 에너지 강국 되려면
과학적·실용적·일관된 정책이 핵심

국내 첫 원자력발전소 고리 1호기가 공식적인 해체 절차에 돌입한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지난달 26일 고리 1호기 해체를 최종 승인했다. 영구 가동 중단과 함께 폐로 결정이 내려진 지 8년 만이다. 대한민국 원전의 출발이었던 고리 1호기는 국내 최초의 해체 원전이라는 또 다른 역사를 시작한다.
원전을 둘러싼 찬반 논쟁은 여전히 뜨겁지만, 고리 1호기가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1960년대 말 도입 논의가 시작될 당시만 해도 국가적 리스크를 안고 출발한 국책 사업이었다. 전체 사업비 1560억 원은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하는 규모였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비가 429억 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국가적 명운을 걸다시피 한 대규모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1978년 상업 운전을 시작할 당시 설비용량 58만 7000㎾는 국내 전체 발전 용량의 9%를 차지했다.
고리 1호기로 인해 1979년 2차 오일쇼크의 파고를 넘어설 수 있었고 에너지 자립과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더불어 원전 전문 인력 양성과 기술 축적이 가능했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아랍에미리트와 체코에 한국형 원전을 수출하는 원전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미국 스리마일, 러시아 체르노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안전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 고리 1호기가 들어서면서 이 일대는 원전 밀집지로 변했고 부울경 800만 주민은 머리맡에 원전을 이고 사는 신세가 됐다. 원전 가동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고리 1호기에 대한 영구 정지 결정도 설계 수명을 넘어선 노후 원전 안전성에 대한 지역사회의 우려가 반영된 결과였다.
고리 1호기는 이제 1조 713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12년에 걸쳐 길고 힘든 해체의 과정이 진행된다. 원전 해체는 기본적으로 방사능 오염을 제거하고 환경을 복원하는 작업이지만 그 자체로 갖는 산업적 의미가 크다. 현재 22개국에서 215기의 원전이 영구 정지된 상태인데 해체가 진행된 것은 25기에 불과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2050년까지 588기의 원전이 영구 정지 대상인데 시장 규모만 500조 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원전 해체 경험이 있는 국가는 미국 독일 일본 스위스 4개국에 불과하고 대규모 상업 원전 해체 경험은 사실상 미국이 유일하다. 원전 해체는 산업 특성상 트랙 레코드(현장적용실적)가 중요하다. 고리 1호기 해체를 통해 실적을 쌓으면 글로벌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현재 우리의 원전 해체 기술은 선진국 대비 80% 안팎에 머물러 있는데 이를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다. 글로벌 원전 해체 시장은 로봇과 디지털 트윈, 신소재 등 첨단기술이 융복합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우리가 원전 건설 경험을 통해 빠르게 원전 강국으로 도약했듯이 해체 기술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정부가 R&D와 실증을 지원하고 민간에 기술을 이전하는 유기적 협력 체제가 필요하다. 부산과 울산의 경계 지역에 원자력환경복원연구원을 설립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정책 리스크다. 정권에 따라 친원전, 반원전으로 에너지 정책이 극단을 오가는 게 산업생태계에 치명적이다. 고리 1호기 영구 정지가 결정된 후 해체 승인이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부울경을 중심으로 사업 참여를 준비 중이던 중소기업이 많이 이탈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원전 해체 시장은 각국의 정책 결정에 따라 변화가 많아 정부가 의지를 갖고 정책을 밀고 가지 않으면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국가 에너지 안보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원전 해체 경험은 우리가 원전 산업 전 주기에 걸쳐 기술력을 확보하게 된다는 의미다. 원전 건설에서부터 해체에 이르기까지 턴키(일괄)로 수주할 수도 있고 고도화된 기술로 공정별 참여도 가능하다. 물론 전제 조건은 안전이다. 원전 해체는 사용후핵연료 냉각 및 반출, 오염 구역 제염, 건물 철거, 폐기물 처분, 부지 복원 등의 순으로 진행되는데 방사성 폐기물 관리가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안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산업생태계고 뭐고 끝이다.
원전 해체가 시작되면서 영구처분장 문제도 발등의 불이다.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동안 외면한 핵발전의 숨은 비용을 다시 따져야 하는 ‘진실의 순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따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게 당연한 전제다. 이재명 국민참여정부가 ‘실용’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에너지 정책에서도 이름값을 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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