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정용관 동아일보 논설실장] ‘반장 빼앗긴 애순이’와 ‘후보 교체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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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025-05-12 10:24본문
국힘 주류, 당권 욕심 없는 한덕수 내세우려
기본 절차 무시하고 ‘엘리트주의’ 민낯 노출
대중은 ‘억울한 약자’ 만드는 기득권에 분노
당의 대들보 서까래 무너지는 소리 안들리나

국민의힘이 새벽에 김문수 대선 후보 지위를 박탈하고 한덕수 전 국무총리를 새 후보로 내세우려는 시도를 감행했다는 소식에 평소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한 지인이 연락을 해 왔다. 그는 대뜸 “다른 건 모르겠고” 하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가 반장 자리 빼앗긴 것이랑 뭐가 다르냐고 했다. 극 중에서 어린 애순이는 반장 선거에서 1등을 했지만 2등을 한 부잣집 아들에게 반장 자리를 내줘야 했다. 담임 선생이 그리 하라고 호통을 친 것이다. 가난 때문에 반장 자리 빼앗긴 애순이나 힘이 없어 후보 자리 빼앗기게 된 김 후보나 본질적으론 다를 게 없다는 얘기였다.
정치에서 가장 무서운 민심이 ‘동정심’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만 하루도 안 돼 한 전 총리로의 후보 교체안이 국민의힘 전 당원 조사에서 부결된 것은 이런 세간의 바닥 민심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최소한의 기본(基本)도 지키지 않은 채 새벽에 날치기하듯 멀쩡한 후보를 끌어내리고 한 전 총리를 대신 후보로 세우려 음습한 공작을 펼친 데 대한 ‘정서적 분노’가 컸던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국민의힘은 기득권 세력의 정당, 엘리트주의 정당임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온 힘을 쏟아 간신히 본선 무대에 올랐는데, 대의명분이니 선당후사니 하며 “네가 양보하라”고 거칠게 요구한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선발전엔 참여하지 못했지만 평소 공부도 많이 했고 유학도 했고 외국어도 잘하고 실력도 좋은 사람이 대신 나가면 좀 더 승산이 있을 수도 있는데 왜 고집을 부리느냐는 식이다. 당사자가 얼마나 억울해할 것인지에 대해선 둔감하다.
자신은 그런 무시험 전형에 올라탈 만한 예외적 인물이라고 스스로 여긴 듯한 한 전 총리의 자기중심적 우월주의도 일반 정서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그가 과도기 국정을 잘 이끌 수 있는 경륜과 역량을 갖춘 인물일지도 모르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건 사후 평가의 영역이다. 후보 선출 과정의 절차적 정당성이 취약한데도 오히려 채권자인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쌍권’은 왜 초현실적인 무리수까지 두며 한 전 총리를 대선 후보로 밀어붙이려 했을까. “을지문덕” “김덕수” 운운했던 김 후보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달라졌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 맞다. 다만 그와 별개로 단순한 상호 불신이나 감정싸움으로만 볼 수는 없는, 우리 정당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사실상의 ‘심야 쿠데타’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기획자이고 실행자인지, 드러나지 않은 배후가 있었던 건지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 전 총리가 단일화 확답도 없이 50년 공직 끝무렵에 불확실한 대선에 뛰어들 리는 없다. 필자는 4주 전 ‘한덕수 출마론…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반(反)이회창’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모델을 언급했다. … 한 대행은 자의든 타의든 ‘대선 경기장’ 옆까지는 온 듯 보인다.” 그 칼럼을 쓰기 전 ‘정치권 인사’들에게 들은 얘기는 이낙연 전 총리까지 포괄하는 훨씬 구체적인 반명 연대 구상이었다. 용산의 핵심 인사에 이어 나중엔 대통령 직속 위원회 핵심 인사들, 특정고 인맥이 관여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이런 흐름의 배후에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있는지는 모호하다. 그렇다는 얘기도 있고 아니란 얘기도 있지만, 솔직히 윤 전 대통령이 ‘중심 권력’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60여 명의 의원들이 ‘후보 교체’ 무리수에 동의했던 가장 큰 이유는 설령 지더라도 당권 욕심이 없는 한 전 총리가 가장 무난한 대안이라는 데 이심전심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지금 갖고 있는 기득권이라도 지키고 혹시 모를 사법 우려를 막기 위해 일단 뭉쳐야 한다는 집단 보호 본능이 작동한 것은 아닐까. 정권 교체 후 닥칠 수도 있는 사정 정국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이런 공포감이 ‘최초의 호남 후보’ ‘통상 전문가’ 등 이재명 후보에 대한 비교 우위 기대와 맞물려 한 전 총리로의 단일화에 대한 막연한 집단 희망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19세기 궁정에서나 벌어질 법한 초현실적 사건이 토요일 새벽 벌어졌다. 국민의힘 수준이자 실력이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당원들의 집단 지성이 발휘된 게 다행이다. ‘기본’을 지키지 않으면 정당 민주주의의 치명적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훈이라도 얻길 바란다. 국민의힘의 대들보와 서까래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데 이번 사태의 책임자들은 알고는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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