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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칼럼-이진우 매일경제 논설실장] ‘트럼프의 막무가내’, 수락하자니 능력이 안 되고…판을 엎자니 후환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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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80회 작성일 2025-09-1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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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협상에 무너졌던 日경제
한미 관세협상후 파장 대비를
투자 고갈과 고용난·내수침체
韓경제 재기불능 내몰수도
늦기전에 위기대응 나서야

역사책을 들여다보면 대외 협상이 국가 경제의 궤적을 바꿔 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85년 9월의 플라자합의가 대표적이다.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 일본 엔화 절상을 강제한 이 합의는 일본 경제에 치명적인 방향 전환을 불러왔다. 불과 2년 만에 달러당 240엔이던 엔화 가치가 120엔대로 치솟았다.

급격한 엔고로 수출 경쟁력을 잃은 일본 제조업은 앞다퉈 해외로 이전했다. 공장이 사라지자 일자리와 지역 경제가 동시에 무너졌다. 일본 정부의 선택은 금융 완화와 재정 확대였다. 자산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경기가 잠깐 반짝했을 뿐, 1990년대 초 버블 붕괴라는 벼락을 맞았다. 플라자합의는 생산기지 해외 이전, 산업 공동화, 내수 침체, 금융 완화와 재정 확대, 자산 버블 그리고 버블 붕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출발점이었다. 국제 협상의 결과가 한 나라의 성장 엔진을 꺼뜨린 역사적 장면이다.

반대로 협상이 도약의 발판이 된 사례도 있다. 1953년 서독의 런던 채무 협정이 그렇다. 2차 대전 후 서독은 전쟁 배상금과 외채 부담에 짓눌려 있었다. 그러나 런던채무협정으로 절반가량의 채무를 탕감받으면서 숨통이 트였다. 그 힘으로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린 고도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세계 무역 체제에 편입된 중국은 외국 자본을 대거 유치하며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다. 오늘날 G2(미국·중국) 패권경쟁의 씨앗이 그때 뿌려졌다.

국가별 관세율 발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PA연합사진 확대
국가별 관세율 발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PA연합

현시점에서 한국이 직면한 최대 도전은 미국과의 관세협상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3500억달러 투자펀드 요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이번 관세협상은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얘기했듯 뭘 얻어내기 위한 협상이 아니다. 공격은 없고 방어만 있는 협상이다. 따라서 서독의 런던 채무 협정이나 중국의 WTO 가입 협상처럼 ‘꿀’이 떨어질 가능성은 애시당초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현금투자 계약을 고집하면서 한국은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받아들이자니 능력이 안 되고, 판을 엎자니 후환이 두렵다. 협상이 결렬될 경우 단순히 25% 관세 부과에 그치지 않고 더 큰 보복과 불이익이 뒤따를 수 있다.

설사 협상에서 일부 양보를 이끌어낸다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차피 사상 초유의 대규모 외환유출과 대미 직접투자는 확정적이다. 그것만으로도 국내 투자여력은 고갈되고, 좁디좁은 서울외환시장은 붕괴를 걱정해야할 판이다. 제조업 공동화와 그에 따른 일자리 감소, 내수 침체는 불 보듯 뻔하다. 그다음 순서가 재정 확대인데, 현 정부는 이미 그 열차에 올라타 있다.

한미 통상협의차 미국 워싱턴DC를 방문 중인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7월 29일(현지시간)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및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과 함께 미국 상무부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통상협의를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사진 확대
한미 통상협의차 미국 워싱턴DC를 방문 중인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7월 29일(현지시간)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및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과 함께 미국 상무부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통상협의를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일본은 그래도 한국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쌓아놓은 국부가 있었고, 급등한 엔화값도 해외자산 확대에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일본은 준기축통화국이다. 한국이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 20년’을 버텨낼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저출생 고령화와 산업경쟁력 하락 추세를 감안하면 낙관하기 어렵다.

무서운 일이 임박한 듯하지만, 한국 사회는 천하태평을 넘어 기괴할 지경이다. 노동계는 주 4.5일제와 정년 연장을 외치고, 정부는 법인세를 올리며, 여당은 반기업 법안을 밀어붙인다. 그럼에도 코스피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다. 위기의식은 찾아볼 수 없고, 사람들은 뭔가에 홀린 듯하거나 속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버슈팅 이론의 창시자 루디거 돈부시가 말했듯, 경제위기는 느리게 다가오지만, 한번 닥치면 순식간에 전개된다. 눈앞의 안정을 믿고 안일하게 대응해선 안 된다. 어쩌면 한국판 플라자합의가 이미 문을 두드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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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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