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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칼럼-남궁창성 강원도민일보 상무이사 겸 미디어실장] 1905 을사년(乙巳年)의 세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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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9회 작성일 2025-10-28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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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1905년 조선이 망했다. 바로 120년 전 일이다.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을 왔다. 고종은 10일 그를 접견하고 일본 국서를 받았다.


그가 서울에 도착하자 민심이 흉흉해져 모두 변란이 일어날까 걱정했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이 왕이 있는 경운궁을 에워싸고 대포까지 설치했다.


11월21일 밤 이토가 어전에 들어가 다섯 개 조항으로 이뤄진 신 조약을 내놓고 서명을 요구했다. 고종은 벌벌 떨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1848~1930년)이 분노해 말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이 조약은 허락할 수가 없다.” 고종은 개미 소리로 “이것은 외부(外部)의 일이니 대신에게 물어야 한다.”


외부대신이 주사를 불러 직인을 가져오게 하여 찍게 했다. 임금은 찍지 않았고 한규설도 찍지 않았다.


외부대신 이하 각 부 대신들만 찍었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부대신 권중현(權重顯). 을사 오적(五賊)이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해 실질적인 식민 통치에 들어갔다.


내부대신 이지용이 궁궐에서 도장을 찍고 나오면서 말했다. “나는 오늘 최지천(崔遲川)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아니면 나랏일을 누가 하겠는가?”


병자호란(1636년) 당시 주전파와 달리 청나라와 화친을 도모했던 지천 최명길(崔鳴吉·1586~1647년)의 호를 거론하며 변명하고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이다.


# 한규설의 이름 없는 여종.

 


▲ 애국지사 한규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 애국지사 한규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이근택과 한규설은 사돈지간이었다. 한규설의 딸과 이근택의 아들이 결혼했다. 두 사람은 을사년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것이다. 양가가 혼사를 맺던 날 한규설의 딸은 그동안 친정에서 자신을 돕던 여종을 데리고 시집을 갔다.


이근택이 을사늑약 도장을 찍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와 땀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다행히 죽음을 면했소!” 한규설의 여종이 이 소리를 듣고 서슬이 시퍼런 부엌칼을 들고 나와 꾸짖었다.


“이근택, 이놈아! 네가 대신까지 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나 돼지보다도 못하다. 내 비록 천한 종이지만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느냐? 내 힘이 약해서 너를 반 토막으로 베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이 여인은 한걸음에 뛰어 본가인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갔다. 한 여인의 기개와 정신이 나라를 팔아 먹은 한 나라 대신의 간담을 떨게 하고도 남았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 참판 홍만식(洪滿植·1842~1905년)이 약을 먹고 자결했다.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1861~1905년))이 11월4일 스스로 목을 찔러 숨졌다. 특진관 조병세(趙秉世·1827~1905년)가 약을 먹고 자결했다. 앞서 5월 영국주재 런던 공사관의 참서관 이한응(李漢應·1874~1905년)이 망국의 모습을 보다못해 현지에서 자결 순국했다.


# 망국의 창부(娼婦) 이홍경.

 


▲ 을사오적 이지용의 처 이홍경.

▲ 을사오적 이지용의 처 이홍경.

이듬해 1906년 내부대신 이지용이 특파 대사로 일본을 갔다.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감 유임을 요청하는 임무를 맡아 바다를 건넌 것이다. 당시 이지용의 아내 홍씨가 이름을 이홍경(李洪卿)으로 작명했다. 여성들에게 성(姓)만 있고 이름이 없던 시절이다. 남편과 자신의 성에 벼슬 경(卿)을 붙여 이름을 지었다.


그녀는 총명하고 미색도 갖추고 있었다. 이지용은 원래 허랑방탕(虛浪放蕩)해 고종으로부터 자주 질책을 들었다. 일찌기 이홍경이 왕궁을 드나들며 고종 후궁인 엄비(嚴妃)의 힘을 빌려 왕의 마음을 바꾸니 남편 이지용이 출세했다.


이홍경은 일어와 영어도 잘했다. 양장 차림으로 이지용의 손을 잡고 한낮에 거리를 활보했다. 인력거를 타면 담배를 피워 물고 우쭐거리며 달렸는데 장안의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돌리고 눈을 가렸다.


그녀는 일본의 고위관리 여러 명과 정을 통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어느날 일본으로 귀국하니 이홍경이 배웅을 나와 진한 키스를 했다. 일본 관리가 자신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 그녀의 혀를 깨물었다. 이홍경은 고통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뒤 사람들이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그녀의 난잡함과 천함을 비웃었다.


# 을사오적에 침을 뱉은 산홍(山紅)

 


▲ 진주의 의기 산홍

▲ 진주의 의기 산홍

부창부수(夫唱婦隨). 그 아내에 그 남편이었다.


진주기생 산홍(山紅)이 재주와 미모가 뛰어 났다. 이지용이 천금을 주고 첩으로 삼으려 했다. 평소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흠모하던 산홍은 단칼로 거절했다.


“세상에서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첩은 비록 천한 창기지만 어찌 역적 놈의 첩이 되겠습니까?”


이지용이 화를 크게 내며 산홍을 때렸지만 그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년)이 이 이야기를 듣고 시를 지으니 조선 팔도에 산홍의 이름이 별처럼 빛났다.


‘온 세상 모두 다투어 나라 팔아먹은 놈 좇아(擧世爭趨賣國人) / 노복과 계집종처럼 굽신거리느라 날마다 바쁘구나(奴顔婢膝日紛分) / 그대들 금과 옥이 지붕보다 높더라도(君家金玉高於屋) / 산홍의 일편단심은 사기 어려우리라(難買山紅一點春).’


120년 전 이토 히로부미의 뇌물을 받아 먹고 나라를 팔아 먹은 을사년 오적과 함께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세 여인을 기억한다.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출처 : 강원도민일보(https://www.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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