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감사 칼럼- 김창균 조선일보 논설주간] 文 왕따시킨 김정은·트럼프 커플, 李도 제물 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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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6회 작성일 2025-08-21 09:42본문
2019년 판문점에서 만난 세 정상 - 2019년 6월 30일 남·북·미 판문점 회동 당시 문재인(가운데)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트럼프(왼쪽)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악수를 나누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2018년 9월, 2박 3일간의 평양 정상회담 동안 한반도 운전대를 쥔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처럼 보였다.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은 공식 회담 2번, 함께한 식사 4번, 백두산 천지 방문 등을 포함해 총 17시간 5분 동안 김정은 위원장과 같이 보냈다”고 브리핑했다. 문 대통령은 대(對)국민 보고에서 “비핵화의 빠른 진행을 바라는 김 위원장 입장을 확인했다”면서 “미국에 이런 뜻을 전하겠다”고 했다. 미·북 간 중재 역할이 자신에게 맡겨졌다는 취지였다.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복귀한 청와대 사람들은 김정은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하려 애썼다. 우리 측 대표단 기념사진 촬영 때 “제가 찍어드리면 어떻습니까”라고 했다든지, 한국에서 유행하는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보려다 “나는 모양이 잘 안 나옵니다”라고 아쉬워했다는 식이었다.
김정은은 남측 대표단이 떠난 다음 날인 2018년 9월 21일,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트럼프가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다”고 자랑한 그 편지다.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남북 정상회담을 마친 감격이 담겨 있을 법한 시점이었다. 청와대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짐작했을 것이다. 4년 후 뒤늦게 공개된 내용은 정반대였다. 김정은은 “저는 앞으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각하와 직접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하기 바란다”면서 “문 대통령이 우리 문제에 대해 표출하고 있는 과도한 관심은 불필요하다”고 썼다. 김정은을 “연장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예의 바른 청년”이라고 추켜올렸던 문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은 참으로 민망했을 것이다.
이런 속사정을 몰랐던 국민들은 문 대통령이 트럼프, 김정은과 2인 3각 체제로 한반도 평화 체제를 이끌어 가는 줄 알았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트럼프 커플에게 왕따당하는 실상이 드러난 것은 2019년 6월 판문점 회동에서였다. 미북 정상이 우리 측 관할 구역인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양자 회담을 갖는 동안, 호스트 격인 문 대통령은 다른 방에서 대기했다. 문 대통령은 “나도 초대받았지만 오늘 중심은 미북”이라고 했다. 마치 일부러 자리를 피해준 것처럼 설명했다. 미국 측 관계자들의 후일담은 딴판이었다.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은 “문 대통령은 3자 회동을 원했지만, 김정은은 문에 대한 배려심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볼턴 전 안보 보좌관은 “우리가 여러 차례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문 대통령은 어떻게든 판문점 회담에 끼어 보려고 했다”고 했다.
가물가물 잊혀 가던 일들이 다시 떠오른 것은 현재 남·북·미의 주역들이 그 당시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북의 지도자는 김정은 그대로이고, 미국은 트럼프가 4년 만에 백악관에 복귀했다. 한국만 이재명 대통령이라는 새 얼굴이 등장했지만 대북 정책 노선은 문 전 대통령 때와 빼닮았다. 대북 확성기 철거, 대북 전단 단속에 이어 50년간 지속됐던 북한 주민용 대북 방송까지 중단했다. 한일 관계 메시지가 주제여야 할 광복절 80주년 기념사에서도 “(평양 정상회담의) 9·19 군사 합의를 선제적, 단계적으로 복원하겠다”고 강조했다. 문 정부 때 남북 대화 구걸 노선이 재가동되는 분위기다.
그러나 남북 관계를 복원할 여건은 문 전 대통령 때보다도 열악해 보인다. 우선 문 전 대통령은 미·북이 아직 안면을 트지 못했을 때 상견례를 주선하는 기회를 누렸다. 이 대통령이 등장한 속편에서 김정은과 트럼프는 이미 구면이다. 앞서 세 차례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고 아름다운 러브레터도 27번이나 주고받았다. 반면 이 대통령은 아직 김정은이나 트럼프를 만난 적이 없다.
김정은은 영변 옛 시설을 포기하면 핵 합의가 성사될 것이라는 문 전 대통령 말을 믿고 하노이 정상회담에 나섰다가 트럼프에게 퇴짜 맞았다. 그래서 한국이 미국을 움직일 힘이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더구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틈탄 러시아와의 군사 합의를 성사시킨 김정은에겐 든든한 뒷배가 생겼다. 한국은 물론, 미국의 도움이 아쉬운 처지가 아니다. 오히려 미북 대화 재개에 안달이 난 쪽은 트럼프다. 벌써 여러 차례 대화를 제의하고 북쪽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한국의 중재를 성가셔한다는 점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이재명 정부가 미·북 지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문 전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20년 전 퍼주기밖에 모르는 대북 정책 사령탑의 낡은 아이디어로는 이 대통령마저 왕따 제물 만들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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