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이진우 매일경제 논설실장] 시장이 정치에 말 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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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8회 작성일 2025-08-08 10:10본문
투자자 무시, 시장이 응징
개미가 정치판 흔드는 시대
증시 무너지면 정권도 흔들

주가 상승은 정책의 결과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목표가 돼선 안 된다. 정부가 주가에 집착하면 성장, 고용, 혁신 같은 경제정책의 본령이 뒷전으로 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정부가 내건 '코스피 5000' 비전은 매력적이다. 정체돼 있던 우리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역동성을 확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째 2000선에 갇혀 있던 코스피가 새 정부 출범과 함께 3000선을 단숨에 돌파한 것부터가 신통하다.
필자 역시 '코스피 5000'을 간절히 바란다. 주식으로 한몫 챙기고 싶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주식을 하지 않는 국민에게도 큰 축복이 될 수 있기에 기대하고 응원한다.
예컨대 부동산에 쏠린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옮겨 와 집값을 잡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구상이 현실이 된다면 모든 국민이 혜택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한국 증시가 강해지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훨씬 깊고 본질적인 변화를 맞게 될 것이다.
지난 1일 세제 개편안이 발표된 직후 코스피와 코스닥이 각각 4% 안팎 급락하며 하루 만에 시가총액 116조원이 증발했다. 정부와 여당은 당황했고, 곧바로 '재검토' 시그널이 흘러나왔다. 의미심장한 장면이었다.
금융에 얼라인먼트(alignment)라는 개념이 있다. 스톡옵션을 통해 경영진과 주주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듯,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목표를 조율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지난 1일 주가 폭락과 여당의 반응을 보며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한국 자본시장에도 드디어 국민과 정치권 사이에 얼라인먼트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 아닐까.
팬데믹 이전 600만명 수준이던 개인 주식투자자는 현재 1400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경제활동인구 절반 가까이가 '개미'다. 무리한 정책으로 주가가 떨어지면 다수의 국민이 분통을 터뜨리게 된다. 표 떨어지는 소리에 정치권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과 정치의 거리가 급격히 좁아진 셈이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포착된다. 삼성전자는 그 상징적 사례다. 2018년 이 회사는 주식을 액면분할해 280만원대였던 주가를 5만원대로 낮췄다. 그 결과 주주가 24만명에서 500만명 이상으로 폭증했다. '재벌 개혁'의 단골 표적이던 삼성전자는 이제 국민이 지켜보고, 박수 치고, 걱정하는 '국민 기업'이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웬만한 연예인보다 인기가 많다.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되고, 삼성이 잘살아야 투자자도 잘산다." 지난 3월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이 대통령이 이 회장에게 건넨 말이다. 이 말에 국민, 기업, 정부, 정치권이 한 방향을 바라보는 얼라인먼트의 요체가 담겨 있다.
코스피가 5000선에 가까워질수록 이러한 얼라인먼트는 더 단단해질 수 있다. 선진국에선 이미 상식으로 자리 잡은 현상이다. 전 세계를 벌벌 떨게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주가가 흔들리면 움찔한다. 성인 62%가 주식을 갖고 있는 미국에선 대통령 지지율과 주가가 사실상 연동돼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상상의 영역일지 모른다. 그러나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노란봉투법' 같은 반기업 규제에 대해 기업이 아닌 수많은 투자자가 목소리를 높이는 날이 올 수 있다. 그쯤 되면 일부 시민단체나 귀족 노조의 반시장적 요구도 더 이상 힘을 얻기 어려워질 것이다.
시장이 정치에 휘둘리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시장이 정치를 견제하는 시대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이미 시장은 정치에 말 걸기 시작했다.
[이진우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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