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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칼럼-권혁순 강원일보 논설주간] 지도 위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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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8회 작성일 2026-01-1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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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남원 기자

행정안전부와 산업통상부는 지난해 12월31일 관보를 통해 강릉, 동해, 속초, 인제 등 4곳을 포함한 전국 18개 지자체를 ‘인구감소 관심지역’으로 지정 고시했다. 이로써 강원자치도는 18개 시·군 가운데 춘천과 원주를 제외한 16개 시·군(89%)이 법적으로 공인된 ‘인구소멸 위기’ 단계에 진입하게 됐다. ▼인구는 숫자이되 생명이고, 지도는 선이되 체온을 가진다. 강릉·동해·속초·인제의 이름이 관보 한 귀퉁이에 ‘관심’이란 단어로 묶이는 순간, 지도 위에는 보이지 않는 빈자리가 늘었다. 관심은 애정처럼 들리지만 행정의 언어에서 그것은 경고에 가깝다. 사람의 그림자가 옅어지는 땅은 말수가 줄고, 말이 줄면 기억도 가늘어진다. 숫자는 이미 앞서 달아났고, 이름만 남아 서로를 부르고 있다. ▼공자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을 말했다. 즉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는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믿음 이전에 사람이 있어야 했다. 인구 감소는 통계의 문제로 보이지만 실은 약속의 파기다. 학교의 종소리, 시장의 흥정이 사라질 때 도시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 ‘관심지역’이라는 명패는 성문에 걸린 부적이 아니라, 이미 금이 간 돌의 표식에 가깝다. 사마천은 흥망을 기록하며 성쇠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다만 떠난 자와 남은 자의 온도를 적었다. 강릉의 20만, 속초의 8만, 인제의 3만은 숫자의 붕괴가 아니라 온기의 이탈이다. 행정의 문장은 차분하지만 거리의 풍경은 급하다. 줄어드는 것은 인구가 아니라 선택지이고, 남는 것은 적응이라는 이름의 체념이다. 행정이 뒤늦게 이름을 붙인 사이, 삶은 이미 다른 길로 향했다. ▼신화 속 도시들은 신이 떠난 뒤 돌로 남았다. 지금의 신은 사람이고, 떠남은 조용하다. ‘관심’을 지정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머무를 이유를 만드는 일이다. 지도 위의 빈자리는 언젠가 바람이 된다. 그 바람이 노래가 될지, 폐허의 소음이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기록은 시작됐고, 우리는 그 한 줄의 다음 문장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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