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권혁순 강원일보 논설주간] 말의 해 단상(斷想)
작성일 26-01-0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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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남원 기자병오년(丙午年) 새해 아침해가 솟아올랐다. 말의 해라 하면 힘차게 달리는 장면부터 떠올리지만, 정작 새해 첫날은 고요하다. 달력만 바뀌었을 뿐, 어제의 걱정과 미뤄둔 일은 그대로 따라온다. 병화(丙火)의 불은 위로 치솟고 오화(午火)의 말은 앞으로 내닫는다지만, 출발선에 선 우리의 얼굴은 여전히 지난해의 그늘을 달고 있다. 이 둘은 모두 강한 ‘불(火)’의 기운을 상징하지만, 그 에너지의 방향과 움직임에서 차이가 있다. 새해는 언제나 약속처럼 오지만, 약속이 지켜졌는지는 늘 나중에야 드러난다. 출발선에 섰다고 모두 출발한 것은 아니다. ▼옛 기록에는 말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사기’에는 천리마가 있어도 백락(고대 중국에서 말을 감정하는 데 탁월했던 전설적인 인물)이 없으면 제 길을 못 찾는다는 말이 남아 있다. 아무리 빠른 말이라도 방향을 잃으면 헛바퀴를 돈다. 마부작침(磨斧作針)처럼, 큰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말도 결국 속도가 아니라 끈기를 말한다. 바늘이 되기까지 돌을 갈던 집념이 중요하다. 새해마다 쏟아지는 다짐은 말의 고삐처럼 반짝이지만, 너무 많으면 오히려 걸음을 막는다. 말은 달리기 전에 어디로 갈지부터 알아야 한다. ▼연초가 지나면 계획표는 서랍으로 들어가고, 약속은 토사구팽처럼 잊힌다. 병오년의 불은 손을 녹일 수도 있고, 모든 것을 태울 수도 있다. 지난해의 숙제가 남아 있는데 새 목표만 얹다 보면 바닥이 먼저 갈라진다. 새해라는 말이 모든 것을 새로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해가 바뀌어도 같은 길 위에 있다. 새해는 도착지가 아니라 지나가는 고개에 가깝다. ▼그래서 병오년의 다짐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더 큰 희망보다 덜 부끄러운 하루가 낫다. 말은 멈추지 않고, 불은 말없이 타오른다. 삶도 그렇다. 달력의 속도보다 방향이 조금만 달라진다면 그해는 충분하다. 새해라는 말이 핑계가 되지 않기를, 말의 그림자가 해보다 앞서 달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 정도면 이 한 해는 제 몫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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