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남궁창성 강원도민일보 이사 겸 미디어실장] 선한 목자(牧者)
작성일 25-05-1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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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1301년 교서를 발표했다. “세속권이 과오를 범하면 영적 권력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 영적 권력은 위엄이나 고귀함에 있어 어떤 세속권보다 우월하다.” 왕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월을 강조한 교서였다.
13세기 말 봉건제가 붕괴되고 중앙 집권적 절대왕권이 득세하며 교황권은 흔들렸다. 프랑스 필립 4세는 성직자에 대한 과세, 교황청으로의 금전유출 금지 등의 문제로 교황과 대치했다. 그는 1303년 아나니에 머물던 교황을 사로잡았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결국 화병으로 숨졌다.
1305년 추기경 회의는 새 교황으로 보르도 대주교 출신 클레멘트 5세를 선출했다. 이 교황은 28명의 추기경을 임명하면서 25명을 프랑스인으로 충원했다. 교황청을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겼다. 영적 권력이 세속권 아래로 추락했다. ‘교황의 바빌론 유수(幽囚)’는 1376년까지 지속됐다.
이듬해 교황청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 우르반 6세가 선출됐다. 하지만 프랑스 추기경들과 불화했고 새로 프랑스 출신의 교황 클레멘트 7세가 탄생했다. 그는 아비뇽 교황청으로 돌아가 버렸다. 두 명의 교황이 로마와 아비뇽에 각자 진지를 구축했다. ‘교회 대분열’이 40년 가까이 이어졌다. 영국과 독일은 로마를, 프랑스와 에스파니아는 아비뇽을 지지했다.
피사(Pisa) 공의회는 1409년 두 교황의 퇴위를 결정하고 새 교황을 선출했다. 하지만 반쪽짜리 교황들은 퇴위를 거부했다. 결국 세 명의 교황이 난립했다. 1414년 콘스탄츠(Constance) 공의회가 소집됐고 세 교황의 동반 퇴진이 결정됐다. 마르틴 5세가 새 교황으로 선택됐다. 1417년 대분열이 비로소 끝났다.
우리의 교황으로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선출됐다. 레오 14세다. 평생 가난한 이들과 동행했던 목자(牧者)다. 새 교황이 분열 대신 통합을 이루며 벽이 아닌 다리를 놓는 영적 지도자로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출처 : 강원도민일보(https://www.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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