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남궁창성 강원도민일보 이사 겸 미디어실장] 반정(反正)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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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35회 작성일 2025-06-09 11:40본문
1544년 중종(中宗)이 죽었다. 그는 누구인가? 반정(反正)에 성공하며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성군(聖君)을 기약했던 인물이 아니던가. 사후 평가는 어떨까?
사신은 논한다. “상(上)은 인자하고 현명해 세상에 뛰어난 자질로 혼암(昏暗)한 폐조(廢朝)의 시대를 당해 효도와 우애를 독실히 하고 신하의 도리에 극진했다. 폐주의 난정이 더욱 혹독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황천(皇天)의 돌보심으로 천명이 돌아오게 됐다. 신민의 추대를 사양할 수 없어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모두 기뻐하고 종묘사직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됐다.”
기록은 계속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자하고 온화함은 넉넉했으나 과단성이 부족해 진퇴(進退)시키고 용사(用捨)하는 즈음에 현·불초(賢·不肖)가 뒤섞이게 하는 실수를 면하지 못했다. 군자와 소인이 번갈아 진퇴함으로써 권간(權奸)이 왕명을 도둑질하여 변고가 자주 일어났고 정치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재변(災變)이 중첩해서 일어나 신민이 끝내 다시는 삼대(三代)의 정치를 볼 수 없게 됐으니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는 탄식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사신은 논한다. “상은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 재위 39년 동안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우유부단해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진성군(甄城君)을 죽여 형제간 우애가 이지러졌다. 신비(愼妃)를 내치고 박빈(朴嬪)을 죽여 부부의 정도 없어졌다.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를 죽여 부자간 은의(恩義)가 어그러졌다. 대신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중종실록 39년 11월 15일의 기록이다. 지난 3일 실시된 조기 대선에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새 정부가 탄생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통합을 강조하며 ‘모두의 대통령’을 약속했다. 부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국민들의 믿음과 기대에 충성하길 바란다.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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