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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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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회 작성일 2025-11-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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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 6월 7일, 영원한 라이벌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이 마주 앉았습니다.


헨리 8세(1491~1547년)와 프랑수아 1세(1494~1547년)입니다. 헨리는 ‘영국 역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악당’으로 평가되는 인간입니다. 프랑수아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프랑스의 첫 르네상스형(型) 군주로 통합니다.


역사가들은 이 만남을 황금천 들판(Field of the Cloth of Gold) 회담으로 부릅니다. 회담장은 오늘날 프랑스 땅이지만 당시는 도버 해협 건너 잉글랜드령인 칼레 남쪽 평원이었습니다.


‘허세왕’ 헨리 8세는 캐서린(1485~1536년) 왕비를 포함한 5700여 명의 수행원과 3000여 마리의 말을 배에 싣고 거친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는 말을 치장하는데 56㎏의 금을 쏟아 부었습니다. 1년 예산이 11만 파운드였던 잉글랜드는 이 회담을 위해 한 해 예산의 45%인 5만 파운드를 퍼부었습니다.


당시 유럽 정세는 이탈리아 도시 국가간 전쟁을 둘러싸고 잉글랜드,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이 복잡한 외교와 전쟁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1519년 카를 5세(1500~1558년)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됐습니다. 세 나라가 모두 비슷한 연배의 젊은 군주들로 채워지자 외교관계를 새로 정립할 필요가 대두됐습니다.


1년 전 잉글랜드 총리이자 또 ‘다른 왕’(alter rex)으로 통했던 토머스 울지(1475~1530년) 추기경의 제안으로 세 나라는 상호불가침을 약속했습니다. 황금천 들판 회담은 이를 재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 황금천 들판 정상회담 모습을 담은 1890년경 기록화

▲ 황금천 들판 정상회담 모습을 담은 1890년경 기록화

1만㎡에 달하는 평원에 새 도시가 들어섰습니다. 회담장을 가운데 두고 같은 거리에 양국의 베이스 캠프가 마련됐습니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땅인 칼레 남서쪽 긴느(Guines)에,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영토인 칼레 남동쪽 아흐드흐(Ardres)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헨리 8세는 일회성 회담을 위한 가건물을 궁전처럼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크기는 한쪽 면이 100m에 달했습니다. 기둥과 벽을 지지하기 위해 2m 높이의 기단을 다졌습니다. 그 위로 10m 높이의 나무 기둥을 세웠습니다. 벽돌로 세운 벽을 화려한 옷감과 캔버스 천으로 마감했습니다. 주변의 수많은 텐트도 황금천을 비롯한 값비싼 옷감을 아낌없이 써 평원 전체가 금빛으로 출렁였습니다.


회담장 치장을 위해 스테인드글라스 장인이 고용됐습니다. 지붕은 두 나라를 상징하는 색으로 물들인 기름먹인 천을 덮었습니다. 천정에는 커다란 유리 채광창을 뚫어 빛이 한가득 들어왔습니다. 임시 예배당에서는 35명의 사제들이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야외에는 두 개의 분수를 조성했는데 하나는 포도주가 “콸, 콸” 샘솟았습니다.

 


▲ 잉글랜드 왕 헨리 8세.

▲ 잉글랜드 왕 헨리 8세.

회담 기간 내내 연회와 각종 경기, 재담과 서커스도 펼쳐졌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광대와 익살꾼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들은 다양한 재주와 만담을 선보이며 양국의 귀빈들에게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저명한 음악가도 초빙돼 춤곡과 행진곡을 지휘했습니다. 유럽 최고의 프랑스 궁정 합창단도 동행해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했습니다.


마상 창시합과 레슬링 경기도 벌어졌습니다. 왕들은 길이 270m, 폭 100m의 경기장에서 마상시합을 했습니다. 그리고 적당히 져주는 상대를 어김없이 물리치곤 했죠. 그래도 은근히 강인함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헨리 8세가 느닷없이 프랑수아 1세에게 레슬링 시합을 제안했습니다. 세 살이 젊은 26살의 프랑수아 1세가 ‘덩치왕’ 헨리 8세를 쓰러트리며 잉글랜드의 최고 존엄은 땅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훈훈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프랑수아 1세가 혼자 말을 타고 헨리 8세의 막사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헨리가 침대에서 나오기 전 막사에 들어가 “나는 당신의 포로가 됐습니다”라고 속삭였습니다. 헨리는 곧바로 침대를 박차고 나와 프랑수아를 포옹했다고 합니다. 헨리가 옷 입는 걸 도왔다는 이야기, 프랑수아가 잠자리를 덥혀주었다는 미담도 있습니다. 또 헨리가 화려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선물하자, 프랑수아도 값비싼 팔찌를 선사했다고 전합니다. 황금천 들판 회담과 관련해 전해 오는 글과 이야기가 하도 많아 세상 사람들은 진저리를 쳤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그렁저렁 18일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세례 요한 축일이었던 6월24일 일요일, 추기경 토머스 울지가 미사를 집전하는 것을 끝으로 회담은 마무리됐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이날 용이 하늘을 날아 올랐다고 전합니다.


황금천 들판 회담은 수많은 스토리와 인상적인 장면들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성과는 미미하고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불가침을 재확인한 두 나라의 우호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간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가 손을 내민 상대는 프랑스가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이었습니다. 사랑도, 우정도 변했던 것입니다.


어제의 약속이나 합의보다 오늘의 국익에 부합하는 나라와 합종연횡하는 외교적 전통이 시작된 것도 이 회담 이후라고 전합니다. 다자 정상회의나 양자 정상회담의 형식과 절차 등 의전도 505년 전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 회담에서 출발했습니다.


정상간 화려한 만남이 공허한 외교적 인사치레와 실속없는 미사여구로 덧칠한 선언문 한 장으로 끝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1일 끝난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는 과연 어땠을까요?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출처 : 강원도민일보(https://www.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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