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칼럼-남궁창성 강원도민일보 상무이사 겸 미디어실장] 너희 세상은 과연 어떠하냐?
작성일 26-01-0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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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흑산도(黑山島)는 거친 바다와 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한 기운으로 악명이 높았다. 누구는 그 섬뜩한 이름, 흑산 대신에 자산(玆山)으로 불렀다. 바다를 건너간 정치범 가운데 살아 돌아온 이는 드물었다. 다산(茶山)의 형, 정약전(丁若銓·1758~1816년)이 그랬다.

▲ 절해고도 흑산도
사헌부 지평 이태중(李台重·1694~1756년)이 1735년(영조6년) 신임사화 당시 화를 입은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주청했다. 하지만 분당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
절해고도에 도착하니 주민 한 명이 마중을 나와 자기집으로 이끌며 말했다. “이 집은 홍계적(洪啓迪·1680~1722년) 공이 창건한 것입니다. 선생은 노론이시니 이 집을 두고 다른 데로 가시면 안됩니다.”
홍계적이 누구인가?
1721년(경종1년)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노론의 선봉으로 세제(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해 소론과 대립한 인물이다. 얼마뒤 흑산도에 안치됐고, 이듬해 노론 4대신의 당인(黨人)으로 찍혀, 서울로 압송된 뒤 옥사했다.
이태중은 흔쾌히 그 집에 들어가 살았다.
얼마후 이태중과 사이좋게 지내던 소론의 한 벼슬아치가 흑산도로 귀양을 왔다. 그는 한집에 같이 살면서 적막감을 서로 위로하고 싶어했다. 이태중도 허락했다. 그런데 집주인이 안된다고 반대했다.
“노론의 명재상인 홍공(洪公)께서 이 집을 창건하셨습니다. 선생은 노론이시니 제가 감히 머물러 주십사 했지만 어찌 소론을 이 집에 들일 수 있겠습니까? 소론은 따로 맞아 줄 집이 있을 것입니다.”
이태중은 괜찮다고 타일렀지만 집주인은 완강하게 말을 듣지 않았다.
소론 벼슬아치도 그 말을 들은 뒤 더욱 이태중과 같이 지내고 싶어 억지로 그 집에 들어갔다. 그러자 집주인은 곧장 목청을 높여 말했다.
“이제 선생께서는 다른 집으로 옮기십시오. 홍공께서 이 집을 세운 후 계속해 노론이 살았지 한번도 소론이 들어온 적은 없습니다. 지금 사세가 급박하니 제가 장작을 가져와 이 집을 불태워 버리겠습니다.”
소론 벼슬아치가 깜짝 놀라 급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 서울역사박물관이 기획 전시한 ‘흠영 유만주의 한양전’ 모습
유만주(兪晩柱·1755~1788년)가 쓴 1786년 7월17일자 일기에 나오는 일화다. 그는 삼척부사와 형조참의를 지낸 유한준(兪漢雋·1732~1811년)의 아픈 손가락이다.
17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남산 근처 동갑내기 임노(任魯)와 돈독했다. 1774년 겨울, 새해부터 일기를 쓰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부터 1787년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 13년 동안 일기를 썼다. ‘흠영(欽英)’이다.
청년 지식인의 눈을 통해 18세기 조선 사회를 온전히 만날 수 있다. 그는 신분적으로 양반, 당파적으로 노론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벼슬을 마다하고 과거에 부정적이었다. 노론, 소론, 남인간 당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당쟁 이후 그 악영향이 견고하고 만연하기로 들자면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시비(是非)를 가리는 데서 출발해 충신과 역적을 나누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끝이 났다 다시 시작해 지엽말단적인 것을 층층이 첩첩이 쌓아 가니 결국에는 반드시 나라가 망한 후 그만두게 될 것이다.”
흑산도 일화를 일기로 쓰기 7년 전인 1779년 4월29일자 일기다.
유만주가 거친 바다 건너 섬까지 전염된 사색당파의 고질병을 고발한지 240년이 흘렀다. 오늘, 병오년 새해 아침 선생이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
“너희들이 사는 세상은 과연 어떠하냐?”
남궁창성 미디어실장
출처 : 강원도민일보(https://www.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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