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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칼럼-권혁순 강원일보 논설주간] 공무원의 ‘복종 의무’

작성일 25-12-0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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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그림자는 늘 말없이 길었다. 76년 묵은 조항이 비로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지금, 늦게 깬 잠처럼 어지러운 기색이 남는다. 인사혁신처와 행정안전부는 올 11월25일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개정안은 국가공무원법 제57조에 규정된 ‘복종의 의무’를 삭제하고, 표현을 ‘지휘·감독에 따를 의무’로 변경했다. 상관의 위법한 지휘·감독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거나 이행을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 ‘복종’이라는 단어는 군령의 잔향을 품은 채 행정의 심장부까지 스며들어 있었고, 공무원의 침묵을 당연한 예속으로 묶어 두었다. 이번 개정의 출발점이 비상계엄의 어두운 흔적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현대사에 미처 닫지 못한 문이 있음을 드러낸다. ▼나라가 기울 때 가장 먼저 흐트러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지록위마’가 괴담처럼 반복된 이유도 군주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을 알고도 고개 숙인 신하들 때문이었다. 위법한 지시 앞에서 ‘아니다’라고 말할 권리조차 조문에 없었다. 이번 손질은 그 굳은 틀을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틈새 같지만, 틈새가 반드시 빛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공무원은 상관의 명령보다 법령을 먼저 본다고 적혀 있지만 ‘위법’의 경계는 여전히 안개처럼 부유한다. 판단은 각자의 어깨로 내려오고, 책임 역시 그 사슬을 따라 이동한다. ‘간언(諫言)’이 목숨을 걸던 시절과 달리 법적 근거가 생겼다 하나, 조직은 때때로 문장보다 오래된 공기를 우선한다. 개정안이 혼선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는 결국 우리 행정이 지닌 문화의 오래된 비밀을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변화는 시작되었다. 법령의 문구가 사람의 용기를 대신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그 용기가 설 자리는 마련됐다. 이제 남은 것은 조항의 의지가 실제 관청의 책상과 회의실, 도장 아래까지 스며들 시간이 주어지느냐의 문제다. 오랜 굴레를 벗겨낸 빈 공간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그 답을 향한 책임은 더 이상 법전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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