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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12.20] 최은희와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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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9,296회 작성일 2011-12-2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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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영화배우 최은희 씨와 영화감독 신상옥 씨(작고) 부부의 납북 사건을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한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최 씨는 1978년 1월 14일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강제로 배에 태워져 북한으로 끌려갔다. 8일 뒤 평양 남포항에서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당시 정치위원)이었다. 김 위원장이 건넨 첫마디는 “최 선생. 내레 김정일입네다”였다. 그가 납치를 지시한 장본인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남편 신 씨도 홍콩에서 납치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인이었던 이들의 납북은 당시 한국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北 ‘예술 주도자’의 마지막 시도



그제 김 위원장이 사망했다는 북한 방송의 보도가 나온 뒤 최 씨가 다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최 씨는 김 위원장의 사망에 대해 “제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가 치밀지만 그렇게 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북한에 억류됐던 8년여의 세월은 최 씨에게 비극 그 자체였겠지만 이 사건은 북한의 문화예술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김 위원장이 영화광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최 씨 부부는 1983년 평양 시내의 영화필름 보관소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각국의 영화필름 1만5000편이 소장돼 있었다. 직원만 해도 더빙을 담당하는 성우와 영사기사, 번역인력 등 250명에 달했다. 아마도 세계 최대 규모의 필름 보관소일 것이라고 최 씨는 회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 위원장에게 ‘대장금’ ‘겨울연가’ 등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담은 DVD를 선물한 것도 그의 취향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영화광은 그의 부분적인 얼굴에 불과하다. 김 위원장의 인생역정에서 문화예술 전체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김 위원장이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22세 때인 1964년이었다. 처음 맡은 일이 바로 ‘문화예술 지도’였다. 영화뿐 아니라 가극 연극 무용 미술 등 문화예술 전 분야에 걸쳐 ‘주체 예술론’이라는 방향을 제시하고 직접 제작을 지휘했다.



북한을 대표하는 작품인 ‘피바다’는 김 위원장이 1969년 영화로 제작한 데 이어 1971년 가극으로도 만들었다. ‘피바다’와 함께 ‘5대 혁명가극’으로 불리는 ‘꽃 파는 처녀’ ‘당의 참된 딸’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도 김 위원장의 작품이다. 모두 아버지 김일성을 미화한 내용이다. 김 위원장은 “이런 작품들을 통해 북한에 문화예술 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의 낡은 사상적 잔재와 악폐를 청산했다”고 자랑했다. 그에게 문화예술은 김일성에게 충성심을 표현하는 정치적 수단이었다. 그는 마침내 1980년 북한의 공식 후계자로 전면에 등장한다.




정치에 오염된 문화는 자멸한다



북한의 공연예술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을 압도했다. ‘피바다 가극단’과 ‘만수대 예술단’은 여러 차례 해외 순회공연을 통해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기교를 선보였다. 평양대극장과 같은 공연시설도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북한의 문화예술은 월북한 예술인들의 덕을 톡톡히 봤다. 광복 직후 남한에서 활동하던 현역 문인 160여 명 가운데 120명이 북한으로 향했다. 전체적으로 남한 예술인 중 70%가량이 광복과 6·25전쟁 시기에 북한을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북한 정권에 의해 숙청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지만 북한의 문화예술은 출발 단계부터 한국을 능가하는 여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최 씨 부부를 납치하는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 북한의 문화예술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오로지 김일성 체제 찬양과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문화예술에는 창조력과 생명력이 숨쉴 수 없었다. 북한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김 위원장은 “북한 영화인들은 지금 울타리 안에서 자기 것만 보고 남의 것과 대비할 줄 모르는 바보들이다. 그래서 다른 제도 아래 사는 사람을 한번 데려다가 예술을 해보자고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납치 경위를 밝혔다. 최 씨 부부를 납치해 북한 예술의 탈출구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최 씨 부부의 납치는 북한이 문화예술의 실패를 스스로 고백한 사건이었다. 북한 체제의 추락도 이때 벌써 예고됐던 것과 다름없다.



한국은 북한의 ‘피바다’ 해외 순회공연에 자극받아 1978년 4000석 규모의 세종문화회관을 신축했다. 이후 예술의전당 등 문화 인프라 구축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최근 한류 열풍을 통해 우리는 문화 분야에서도 불과 30여 년 만에 급속한 성장을 이뤄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남북한의 체제 차이가 명암을 가른 결정적 요인이었다. 하지만 우리 문화계 일각에는 아직도 문화를 정치적 도구로 여기는 구태(舊態)가 반복되고 있다. 실제로 영화 문학 등에서 유사한 논란이 벌어졌다. 정치에 오염된 문화는 결국 자멸하고 만다는 역사적 진리를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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