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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렬 칼럼/12.5] 슈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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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6,603회 작성일 2011-12-0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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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공산정권은 1950년 2월 소련 KGB 주도 아래 국가보위부(슈타지)를 만들었다. 창설 당시 1000명이던 슈타지 요원은 독일이 통일되기 전 정식 요원만 9만1000여명에 이르렀다. 서독에서 암약하던 비공식 요원은 3만여명, 동독 내의 비공식 협조자는 10만9000명에 달했다. 동독 주민 180명당 1명이 슈타지 요원이었다. 이 기구는 1988년에 동독 정부 예산의 1.6%, 국방비의 27.4%를 썼다.



슈타지는 서독의 정계, 경제계, 노조, 학계, 종교계, 법조계 등 전 분야에 걸쳐 엄청난 요원들을 침투시켰다. 사민당(SPD) 원내총무 뷔난트 의원은 20년간 슈타지 정보요원이었다. 서독 내 각 정당에서 암약했던 슈타지 프락치는 120명이었고 연방의원만 8명이나 되었다. 서독 내 연방 정보국과 군 방첩대에도 침투했다.



이처럼 슈타지가 오랫동안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독의 정치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1960∼70년대 서독 지식인 사회는 동독을 편들었다. 그래야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식인들은 ‘좌파’보다 ‘우파’를 적이라고 생각했다.



1975년 3월 월남이 패망하자 민주화를 외치며 반정부 투쟁에 앞장섰던 가톨릭의 판칵투 신부는 “나는 공산주의자였다”고 전면에 나섰다. 그는 그 후 월맹 공산정권 하에서 국회의원을 했다. 1967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한 야당 대선 후보 쭝딘주도 월맹 공산정권의 프락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또한 도지사로 명망이 높았던 녹따오 지사 등 상당히 많은 저명 정치인, 관료, 종교인들이 공산월맹의 첩자였다.



반면 월남 정부 내 방첩 전문가들은 정권교체 때마다 쫓겨나 사회 각 조직에 침투한 세작들을 솎아낼 수가 없었다. 당시 민주화와 부패 척결을 위해 뜨거운 애국심으로 활동한 종교인들과 이들을 따르는 학생들이 많았으나 공산 프락치들의 침투로 이 조직들은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돼 버렸다.



고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는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직후 “남한 내에 고정간첩 5만명이 암약하고 있으며 권력 핵심부에도 침투해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김정일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서 여권 핵심 기관 회의 내용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오늘 한국 정치사회 상황은 통일 직전 독일의 상황과 너무 흡사하다. 다만 한스 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 대사가 최근 한 모임에서 “멀지 않은 시기에 한국은 독일처럼 통일이 될 것”이라고 한 말에 위안을 얻는다.



이강렬 논설위원 ry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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