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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칼럼-이중근 경향신문 논설주간] 4·3 유복자, 반세기 만에 입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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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7회 작성일 2023-01-2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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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많은 동네와 집안에서 4·3은 아직도 금기어이다. 1949년 음력 7월생, 4·3 유복자인 내 이모부 가족에게도 그렇다. 그 누구도 이모부로부터 그 비극의 전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3년 전 돌아가신 막내이모가 몇마디 해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지나쳤을지 모른다. 그런 이모부가 이번 설에 입을 열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상처를 70 평생 처음으로 드러냈다. 이제는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나와 사촌여동생의 설득 끝에.

이중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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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부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도 아버지가 6·25 난리통에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초등학교까지는 호적도 없이 무적자로 지냈다. 중학교 입학을 하면서 가장 가까운 친족인 7촌 삼촌이 이름을 짓고 호적에도 올렸다. 이때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4·3에 희생됐다는 말을 들었다. 그저 난리를 피한다고 이웃마을 처가의 광 속 항아리에 숨어 지내다 “이제는 나와도 좋다”는 말을 믿고 나왔다 인근 마을 청년들과 함께 한꺼번에 총격 피살당했다는 것이다.

사실을 알고부터는 이모부도 그냥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14세 때 아버지 무덤을 찾아내 정식으로 장사를 지냈다. 무덤을 연 그는 충격을 받았다. 이모부는 “몸통은 가지런히 놓였는데…”라고 한 뒤 말을 잇지 못했다(더 이상 구체적으로 물을 수 없었다. 아니, 이모부가 답변을 얼버무린 것도 같다). 그냥 시신만 겨우 수습해 서둘러 묻었던 것이다. 이모부의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0년대 초 4·3 희생자를 신고하라는 공고가 나왔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이웃마을 생존자를 찾아가 증인을 서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따라오라고 했다. 같은 마을 어떤 사람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더니 그 사람에게 도장을 찍으라며 “이 사람이 네 아버지를 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순간 약관의 청년이었던 이모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침묵만이 어두컴컴한 방에 흘렀다. 그 집 아들들이 방으로 들어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도장을 찍었다. “아버지의 억울한 희생을 확인했다는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원망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순간, 내 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감정이 없는 듯 증언하는 이모부의 표정에 가슴이 더 아렸다.

4·3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새로운 사실과 증언이 나오고 있다. 그것도 바로 우리 곁에서. 지난해 12월에는 4·3 당시 내란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한 박화춘 할머니(95)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 밭에 숨어 있다 붙잡혀 고문 끝에 “산사람(무장대)에게 보리쌀 2되를 줬다”고 허위로 자백했다. 군사법원에서 1년 징역형을 받아 복역했다. 자녀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내내 숨기다 최근에서야 아들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할머니는 어제 일처럼 당시를 생생히 기억해냈다.

박 할머니는 “창피해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생한다”며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걱정했다. 내 이모부도 자신의 상처보다 가족을 더 염려한다. 이모부의 부친을 쏜 사람은 증인서에 도장을 찍은 몇년 후 사망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박 할머니처럼 재심으로 명예를 회복한 4·3 피해자가 521명이다. 드러나지 않은 피해·피해자들이 더 있을 것이다.

4·3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 폐쇄된 한 섬에서 동서 냉전이 불꽃을 일으킨 세계사적 사건이다. 올해는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다. 휴전선뿐 아니라 제주에서도 협정 체결 즈음 총성이 멈췄다. 4·3의 진상 규명과 함께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시작됐다. 4·3 희생자마다 최대 9000만원의 국가보상금이 지급된다. 하지만,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평생 살아온 내 이모부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이 없다. 마지막으로 풀어야 할 비극의 퍼즐인 미국의 책임론도 규명돼야 한다. 국가가 책임 있게 나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4·3은 ‘폭동’이며 ‘반한국·반미·반유엔·친공 투쟁’이라는 사람이 진실화해위원장이 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처럼 4·3의 규명과 치유가 또 질곡에 빠지지 않을까 유족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유족회에 대한 정부지원금도 줄어드는 등 그런 조짐이 도처에서 나오고 있다. 역사의 퇴행은 안 된다. 

원문보기 :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12503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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