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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칼럼-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윤 대통령은 지옥문 앞에 서 있다

작성일 22-06-1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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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주필·부사장

취임 한 달을 넘긴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불면(不眠)의 밤이 기다리고 있다. 지방선거에서 이겼지만 의회 권력은 여전히 거대 야당의 수중에 있다. 선거가 없는 지금부터의 1년10개월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정쟁을 피하고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 경제와 안보의 복합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지옥문이 열릴 것이다. 실패하면 외환위기를 초래한 김영삼 전 대통령보다 더 가혹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새 대통령이 그럴듯한 구호보다는 살아 숨쉬는 현실을 중시하는 리얼리스트라는 점이다. 출근길에 기자들과 각본없는 질의응답을 나누는 도어스테핑(약식회견) 때 “(질문을) 많이 준비하셨습니까”라고 인사했다. “나는 준비돼 있으니 무엇이든지 물어봐 달라”는 요청이었다. 민주·공화의 근대정신을 부정하는 제왕적 대통령의 우상을 단숨에 부숴버린 파격의 소통이었다. 

각본 없는 즉석회견 신선한 파격
제왕적 대통령의 우상 부숴버려
경제·안보 위기의 강 건너가려면
고통받는 국민과 눈물 흘려야


지금까지 열세 번의 도어스테핑이 있었다. 처음엔 두세 개였던 현안 질문도 여덟 개까지로 늘어났다. 첫 수석비서관 회의는 식순을 없애고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했다. 대통령과 수석의 소규모 회의에서는 대통령의 질문이 많아서 실질적인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이제 참모도, 국민도 ‘제1의 공복(公僕)’인 대통령의 의도를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의 장관들은 불통으로 가장 고통받았다. 현실과 차단된 구중궁궐의 대통령은 일방통행의 추상적 지시를 남발했다. “적어야 산다”는 ‘적자생존’의 시대였다. 장관들이 정확한 뜻을 확인하기 위해 대통령을 만날 수도, 통화할 수도 없어 감(感)에 따라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면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와서 “왜 그러셨어요?”라며 레이저를 쏘았다. 눈치빠른 부하 공무원들은 “우리 장관 바보됐다”는 사발통문을 돌렸다. 이후로는 장관이 허수아비가 됐다. 윤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이런 코미디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등장한 윤 대통령에게 세종의 리더십은 좋은 교과서 될 것이다. 그의 재위기간(1418~1450)도 태평성대가 아닌 위기의 시대였다.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야인(野人)들은 국경과 해안을 제멋대로 침략해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보고 우는 일이 연례행사였다. 몽골족 정복을 위한 명나라 황제의 파병 요청과 말 2만 필 요구, 환관 출신 사신들의 갑질로 골머리를 앓았다. 가뭄과 홍수로 흉작이 아닌 해가 없었고, 창고가 거의 비어 백성을 구휼할 수도 없었다. 굶주린 백성들은 흙을 파서 떡과 죽을 해먹었다.

황희는 세종 재위 초반인 1442년 남원으로 귀양갔다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백성들은 “조선은 겨우 3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도 민심을 얻지 못해 35년 만에 망했다”고 했다. 싸늘한 민심이었다.

세종은 이런 위기를 소통과 애민(愛民)으로 극복했다. 어전회의에서 “아직 과감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爭諫)하는 자나 중론을 반대해 논란하는 자가 없다”며 직언을 요구했다. 이런 긴장된 자세가 35년 만에 망한 후백제, 평균 300년 주기의 중국 왕조와 달리 조선이 518년을 버틴 원동력이 됐다. 세종은 “백성이 비록 어리석어 보이나 실로 신명(神明)한 존재”라며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에서 시작되고, 하늘이 듣는 것도 우리 백성이 듣는 데서 시작된다”고 했다(박현모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지금 우리 앞에 흐르는 위기의 강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고통없이 건널 수 없다. 아픔은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될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했고, 작가 김훈은 “눈에 눈물이 마르면 사물이 뒤틀려 보인다”(『저만치 혼자서』)고 썼다. 연민(憐憫)은 너와 나의 경계를 해체하고 위기에 연대(連帶)하게 한다. 대통령은 지상에서 가장 힘든 자들을 찾아가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한다. 김건희 여사도 화려한 불빛의 흔적조차 없는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슬프고 남루한 처소를 찾기 바란다. 상대와 나를 모두 구원하는 길이다.

야당에는 “사격 중지!”를 제안해야 한다. 상대를 향해 겨눈 정쟁의 총구를 내가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내 편을 불러모아 건배하는 것도 좋지만 반대자들과도 만나 대화하고 양보해야 한다. 그래야 협조를 얻을 수 있다. 검찰 출신 인물 중심의 요직 인사가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다면 합당한 수준으로 조정해야 한다. “필요하면 또 하겠다”는 건 “한판 붙어 보자”는 오기다.

정치가 무엇인가.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다. 권력의 본질은 나의 의도대로 남을 움직이는 폭력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용서받기 어렵다. 다만 국민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파악해 성공시키면 다른 길이 열린다. 막스 웨버가 말한 책임윤리를 다하는 것이고, 용서받을 수 있다. 권력의 시간은 취임식장 하늘에 걸렸던 무지개처럼 허무하게 소멸한다. 윤 대통령이 국민에게 다가가려는 의지는 확고하다. 성공하려면 매순간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국정에 임해야 한다. 


원문보기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201818?sid=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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