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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칼럼-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생명줄이 요동치는데 넋 놓은 정부, 이게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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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12회 작성일 2021-11-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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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주필·부사장 

한국은 지독한 자원 빈국(貧國)이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지만 원자재 공급이 끊기면 대책이 없다. 그런데 생명줄인 글로벌 공급망이 요동치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과 차이나 리스크, 코로나 팬데믹의 파도가 거칠다. 특정 국가에 의존하면 결국엔 독(毒)이 된다. 그런데 한국은 특정 국가에서 80% 이상 수입하는 품목이 3941개나 된다. 전체 수입 품목(1만2586개) 10개 중 3개꼴이다. 중국이 1850개로 가장 많다.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라는 생존 수칙이 무시되고 있다. 

중국발 요소수(尿素水) 대란은 국가가 기본 수칙을 어겼을 때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되는지를 똑똑히 보여준다. 산업용 요소 수입물량의 97%를 차지하는 중국이 수출을 전면 중단하자 도처에서 비명소리가 나고 있다.

특정 국가 의존 원자재 10개 중 셋
중국에 요소 97% 의존 위험 불러
일본, 자체 생산 위주…피해 없어
주도적 전략 전무…어쩔 셈인가

디젤연료를 사용하는 200만 대의 화물차는 배기가스의 매연을 줄여주는 요소수를 주입하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도록 설계됐다. 엄격한 국제 환경기준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움직이는 모든 것을 멈춰 세울 수 있다. 기사들은 주유소를 찾아 헤매면서 10배의 가격으로 사야 했다. 공장과 건설현장 마비, 병원 구급차와 소방차 운행 중단 사태까지 예상됐다. 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이 사과했고, 경제수석도 교체됐다.

한국과 산업구조가 비슷한 일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최대 생산·수출국인 중국 의존도가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다. 요소의 주 원료인 암모니아의 77%를 국내 4개 기업이 생산하고 있다. 전략물자라고 판단해 대비한 결과다. 지난해 12월에는 암모니아를 수소와 함께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지정했다. 채산이 맞지 않아 2011년 국내 기업이 생산을 중단하자 중국 올인을 방치한 한국 정부의 직무유기와 대비된다.

우리는 조선시대까지 중화(中華) 질서를 수용해 생존을 보장받았다. 수시로 변화하는 나라 밖 현실을 파악하면서 독자적인 힘과 안목을 키우는 일에 소홀했다. 외교안보는 동맹국인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에 치우쳐 있는 현실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생존전략을 마련하겠다는 결연한 각오는 지금도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일본은 자기주도적 전략을 모색해 왔다. 문명의 중심지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7세기 초반 쇼토쿠 태자 때부터 동중국해의 사나운 바다에 인명을 수장(水葬)시키면서도 필사적으로 견수사(遣隋使), 견당사(遣唐使)를 보냈다.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에는 독자적인 근대국가 모델을 만들기 위해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미국·영국 등 12개국을 방문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이와쿠라 도모미 특명전권대사가 이끄는 사절단에는 훗날 초대 총리가 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젊은 핵심 실세와 우수한 관료가 포함됐다.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각국의 정치 제도와 인프라, 산업시설을 눈으로 확인하고 100권의 책으로 남겼다. 당시 영국의 더 타임스는 “일본의 상류계급은 스스로 지위를 포기했으며 중대한 사회혁명이 시작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고종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1882년) 이후 “미국이 우리를 살린다”며 1883년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구미시찰단인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다.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 민영익과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 홍영식이 각각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였고, 서광범·변수·유길준이 참여했다. 미국의 체스터 A 아서 대통령과 두 번 만났고, 조선식으로 큰절을 했다. 초대 조선 주재 공사 루시어스 푸트는 미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민영익의 “나는 어둠에서 태어나 광명의 세계를 갔다가 어둠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고백을 적었다.

귀국한 뒤 홍영식·서광범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서구식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강력한 개혁을 꿈꿨다. 이들은 김옥균·박영효·서재필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3일천하로 끝났다. 이와쿠라 사절단과는 완전히 다른, 참담한 결과였다.

한 국가가 기민하게 국외의 정세 변화를 읽고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는 능력은 천년 전이나 오늘이나 생존을 위해 중요하다. 이번 요소수 파동도 중국과 호주의 갈등으로 지난해 10월 호주의 대중국 석탄 수출이 중단됐을 때 사실상 예고됐다. 석탄을 원료로 하는 요소의 생산량이 줄어 중국이 수출 물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출 중단 흐름이 가시화된 지난달 초부터 수입업자들이 SOS를 보냈지만 외교부와 산자부는 외면했다. 이런 사실을 보고받지 못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중국 왕이 외교부 장관과 지난달 29일 로마에서 30분 동안 만났지만 요소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팀장으로 한 ‘요소수 대응 TF’는 11월 5일에야 가동됐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정부인가. 이게 나라인가.

1832년 충청도 홍주 목사 이민회는 영국 무장상선 암허스트호가 고대도(島)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번신은 외교가 없다.(藩臣無外交)”고 거절했다. 부끄러운 사대(事大)의 절정이다. 지금 한국의 국정 운영과 통상외교의 영혼은 이 섬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원문보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23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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