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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칼럼-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미국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작성일 21-06-2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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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코미디언 자니 윤은 1970년대에 미국 TV 토크쇼의 전설 ‘자니 카슨 쇼’에 출연했다. 데뷔 무대의 ‘필살기’는 6·25였다. 한국은 몰라도 한국전쟁은 모두가 알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온 식구가 쫄쫄 굶은 채 단칸방에 누워 있는데 밤중에 도둑이 들어왔다. 얼씨구나하고 일어나 도둑을 털었다.” 미국 시청자들은 폭소를 터뜨렸지만 재미교포들은 눈물을 흘렸다.
  

6·25 때 중공에 대패…철군 검토
이젠 중국 견제하려 한국 잘 대우
가치 떨어지면 결별 통보 각오해야
기업가 ‘야성적 충동’ 존중이 살길

피아(彼我) 560만 명이 죽고 다친 3년여의 ‘소규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한국은 1970년대 초까지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최빈국이었다. 변변한 산업도 없었다. 1961년 5·16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국가 예산의 52%, 국방예산의 72.4%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고 적었다. 원조의 권부(權府) 유솜(USOM, 주한미국경제협조처)에는 수백 명의 미국인이 상주하면서 가난한 신생국의 돈줄을 관리했다.  
 
그런 한국의 대통령이 2021년 미국과 유럽에서 칙사 대접을 받고 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턱 밑까지 따라온 중국의 첨단산업을 따돌리기 위해 반도체·자동차·배터리 제조 강국인 한국의 협조가 절실하다. 이재용·정의선·최태원·구광모가 실질적인 구세주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과 한 배를 탔는데도 중국은 보복하지 않았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한국이 반도체 수출을 멈추면 중국 내 IT 조립 산업도 멈춰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파란 눈의 한국인’ 제프리 존스 전 주한 미국 상공회의소 회장은 한 모임에서 한국 경제의 발전상을 이렇게 정리했다. “전 세계에서 여섯 개 나라가 자체 기술로 자동차를 만든다. 세 나라(독일·일본·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이다. 두 나라(미국·영국)는 전승국이다. 한 나라는 나라도 아니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한국은 2차대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유일한 국가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꾼 기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당사자만 잊고 있다.
 
한국을 살려준 은인은 미국이다. 2차대전 직후 미군 병사들은 듣도 보도 못한 한국에 와서 38선 이남의 일본군 23만 명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을 위험에도 빠뜨렸다. “한국은 전략적 가치가 없다”며 미군 5만7000명을 1949년 6월 전원 철수시켰다. 소련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의 전력 손실을 막기 위해 일본으로 보낸 것이다(『6·25전쟁과 미국』 남시욱). 김일성이 스탈린·마오쩌둥과 합작해 남침하는 데 멍석을 깔아준 셈이다. 그해 11월 맥아더 사령부의 G-2(정보과)에 배속된 슈나벨 대위는 “극동 정세 설명회에 참석했는데 브리핑 장교는 내년 여름 북한이 남침해 남한을 정복할 것이라는 느낌을 말했다”고 했다. 미 육군부는 “북한이 남침해도 한국을 군사력으로 지원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막상 1950년 북한이 남침하자 의외로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닷새 만에 미국의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은 178만9000명의 대병력을 한국에 보냈다. 전사·사망 3만6574명, 부상 10만3284명, 실종 7578명, 포로 7245명이라는 희생을 감내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기자들로부터 “중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해 포기했던 나라의 전쟁에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개입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병 주고 약 주는 미국의 모순적인 결정은 지금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뿐이 아니다. 같은해 12월 22일 합참에서 열린 국무·국방 수뇌부 회의에서는 “중국의 의도가 유엔군을 한국에서 몰아내는 것이 명백하다면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미군을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리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압록강을 건너와 산속에 숨어 있던 중공군  30만 명의 존재를 모르고 맥아더가 1950년 11월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벌이다 대패한 직후였다. 트루먼의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지만 “한국을 포기하자”는 비정한 결론이었다.
 
당시 서울은 “미국이 한국을 중국에 팔아넘기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아 공황 상태였다. 합참은 “미국 본토에서 병력을 증강해 달라”는 맥아더의 건의도 거부했다. “일본의 안전이 위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은 한국에 털끝만 한 영토적 야심도 없다. 중국·일본·러시아와는 다르다. 이 땅에 자유와 민주주의·시장경제의 가치를 심었고, 침략자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다. 그러나 미국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 우리를 버릴 수 있다. 이를 탓할 수도 없다.
 
현대의 정주영, 삼성의 이건희는 쫄닥 망할 각오를 하고 승부수를 던진 참 기업인이다. 케인스가 『일반이론』에서 강조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을 발휘해 잿더미 위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을 만들어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축복은 국민의 민주화 열정과 기업가들의 헌신 덕분이다. 지금처럼 미국과 세계로부터 계속 존중받으려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통합적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할 것이다.

원문보기 https://news.joins.com/article/2409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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