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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칼럼-박미현 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 새로운 볼거리 공연의 등장과 변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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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839회 작성일 2021-06-1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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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앞 뒤 선보인 서양음악 공연, 도민 모여들어 ‘박수갈채’
1920년대 서울 유학생 공연 선봬
‘관동학우회’ 도내 지역 순회 강연
클라리넷·바이올린 등 연주 선사
인제 정의여학교 공연 공간 활용
일제강점기 공연 통제·간섭 빈번


대중가요가 본격 등장한 것은 1920년대이다.최초의 유행가는 박채선·이류색이 부른 ‘이 풍진 세월’(1923)로 확인된다.‘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로 시작돼 ‘희망가’로 널리 알려진 곡이다.유행가 열풍을 불러일으킨 곡은 3년 뒤에 나온 윤심덕의 ‘사의 찬미’다.두 곡은 각각 미국과 루마니아의 악곡으로 한국인의 심상을 가사에 얹어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민요나 잡가와 같은 전통노래와 질감이 다른 낯선 노래와 악기는 이미 19세기에 선교사들이 찬송가를 가르치고,학교에서는 ‘창가’ 수업으로 선보였다.

일제강점기 새로운 볼거리로 등장한 ‘신식’ 서양음악이 강원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1920년대이다.서울로 유학한 학생들이 새로운 공연을 선보이기 시작했다.주로 계몽강연과 토론회를 열면서 흥미를 돋우기 위해 공연프로그램을 곁들인 것이다.후원금 모집과 수재민 구제를 위한 목적으로도 마련됐다.전문공간이 없었던 시대였기에 학교 교실과 교회가 주로 쓰이다가 공회당,극장으로 옮겨간다.지역에서 어쩌다 한번 열리는 구경거리였기에 공연기사는 ‘입추의 여지없이’ ‘정각 전부터 인파가 몰려’ ‘박수 갈채리에 성황’과 같은 표현이 애용됐다.

1921년 서울에서 첫 모임을 가진 강원도유학생모임인 관동학우회는 그해 여름방학을 맞아 강원도내 각 지역 순회 강연회를 마련했다.시사성있는 계몽적 주제로 열변을 토하는 청년 지식인들의 강연과 함께 신경을 쓴 것은 음악연주회였다.강연 앞뒤에 공연 프로그램을 배치해 재미를 돋운 것이다.8월 1일 원주제일감리교회에서 열린 강연회에서는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로 강의했던 노재명이 클라리넷 독주를 선보였다.우숙일의 바이올린,이은계의 하모니카 연주가 잇달았다.박채봉은 독창과 함께 5인 중창을 선사했다.원주지역 청년 2인 중창이 곁들여지며 저녁8시에 시작된 행사는 밤 11시가 돼서야 끝났다.(동아일보 8월 11일자 4면)

같은 해 8월 14일 강릉초등학교(강릉보통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는 신발명 악기인 ‘13혈단소’를 김낙선이 연주한 데 이어 이·박씨 두 여학생의 청아한 음악이 펼쳐졌다.피날레는 강연회를 후원한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생 3인이 출연한 중창으로 다대한 흥미를 일으켰다고 신문은 전하고 있다.

1922년 7월 22일자 매일신보에 ‘고학생 순회극’이 강원도내 전역에서 돌아가며 열린다고 보도됐다.무대는 관동대 대장 박순병,단원 이병립·이중혁·장은용·유광일·윤기현 출연이 예고됐다.7월 24일 철원을 시작으로 8월 25일 울진까지 도내 19곳에서 공연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신문기자는 ‘조그마한 주먹과 헐벗은 몸으로 추운바람과 서늘한 습기를 무릅쓰고 주린 배를 움켜쥐며 힘에 넘치는 쓰라린 노동을 하여가며 배우고자 함에 있는 고학생이 서울시내에 1000명 가까이 있으며,아직까지 안정생활을 보장할 만한 설비가 없으므로 고학갈돕회에서는 고학생들의 합숙소를 경영할 목적으로 5만원의 기부 허가를 내었는데 각지의 유지에게 동정을 얻기 위하여 이번에 순회극단을 조직하여 각처에서 공연’중이라며 개최 배경을 상세히 알리며 많은 관람을 바라고 있다.

인제군에서는 1911년 미남감리회 여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정의여학교가 공연 공간으로 사랑받았다.인제 출신 재경유학생회는 1924년 여름방학을 맞아 정의여학교 교실에서 소인극을 개최했다.서해안 지역 수해 구제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동아일보 1924년 10월 5일자) 인제지역에는 음악을 연구·연주한 단체가 있어서 다채로운 공연의 장이 제공됐다.인제연악회 주최,동아일보 기린지국 후원으로 1929년 5월 18일 공회당에서 신록음악대회가 열렸다고 여러번 보도됐다.음악회는 당초 4월 29일이었는데 사정으로 연기됐다가 이날 개최된 것이다.인제찬양대와 일본인,중국인 명사들이 악사로 출연한 무대였다.인제연악회는 인제엡웟청년회와 함께 음악 강습에 나서기도 했다.1932년 1월 13일자 동아일보 7면에 ‘인제서 음악 강습’기사에 정의여학교에서 관악,성악,유희,댄스 등을 가르치며 회비 50전으로 모집 중이라고 실렸다.음악교사는 염석정과 김한경이라고 소개된 것으로 보아 연악회 회원으로 추정된다.청년회는 인제연악회 후원으로 극빈자를 돕기 위한 소인극 무대를 열기도 했다.(동아일보 1932년 1월 30일자)

1925년 통천군 고저항 삼성구락부는 8월 20일 통명학교 교실에서 음악연주회를 열었다.공연 목적은 악기를 더 구입하기 위해서였는데 관객 수백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1926년 횡성군에서는 횡성읍소년회에서 ‘용호단’을 신설해 창립 발회식과 함께 신춘시민위안 음악대회를 열기로 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 1926년 1월 28일자 6면에 보도됐다.

1920년대는 식민지시대의 부조리에 민감했던 청년을 중심으로 사회적 확산을 목적으로 공연의 장을 펼쳤음을 보여준다.신문사에서 공연을 주최,후원하는 경우도 적지않다.1925년 9월 개설된 동아일보 원주지국은 독자 대상 위안 잔치로 ‘활동연쇄극’을 상영했다.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독자가 300여명에 달하며 전망이 밝아 10월 4일 활동연쇄극을 서비스한 것이다.상영된 활동사진은 원주의 시계포 ‘영화당’ 주임 김완식씨가 특별히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라고 10월 2일자 6면 ‘본보 독자 위안 원주지국에서’기사에서 알리고 있다.

1928년 강릉에서는 무용 공연 도중 갑작스러운 화재 소식으로 중단된 사태가 벌어졌다.그 사연이 1928년 5월 4일자 중외일보 4면에 ‘중도 해산된 강릉무도대회’ 기사로 소개됐다.4월 29일 오후 6시 강릉공회당에서는 러시아 출생의 천재적인 무용가로 주문진항에 살고있는 한국인 김안나양 초청 무대가 강릉체육협회 주최로 열렸다.강릉지역에서는 처음 개최되는 음악무용공연인 만큼 몰려드는 남녀 관중으로 장내는 입추의 여지가 없는 대성황으로 만장박수와 함께 무대가 올랐다.시작되자마자 별안간 일어난 강릉시내 대화재 소식으로 중도 해산됐다는 것이다.춘천에서는 1931년 무용가 최승희가 강원도내 유일하게 공연했다.전국 순회공연 일정 중 2월 21일 춘천공회당에서 3부로 나눠 ‘그들은 태양을 구한다’‘인도인의 비애’‘엘레지’ 등 15종을 선보였다.

유치원을 운영하는 불교와 기독교 종교 공간에서는 어린이 발표회가 열리곤 했는데,볼거리가 드물었던 당시에는 즐거운 구경거리였다.강릉불교포교당 금천유치원에서 1925년 7월 29일 설립 1주년 기념일을 맞아 전람회를 마련했다.여자청년회와 소년회에서 재배한 화초 전람회와 함께 저녁에는 원생의 유희와 꽃놀이,소녀의 이별곡,무용 등 18·19종의 다채로운 무대가 선보였다.발표회는 전학자씨의 ‘우리의 지상 낙원은 오직 어린이의 배양인 유치원’이라는 개회사로 기념식의 첫 막을 열었다고 한다.(시대일보 1925년 8월 7일자) 중외일보 1929년 6월 14일자 3면의 ‘원주교회 꽃주일’기사는 원주 미감리교회에서 6월 9일을 꽃주일로 정하고 오전에 어린이공연을 개최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황덕주의 사회로 천진난만한 소년소녀들이 출연해 창가와 유희 등 10여종으로 관중에게 흥미를 줬다는 뉴스다.

전통시대 때 관청에서 가무를 전담했던 기녀는 일제강점기에 속칭 ‘요리집’에서 일해야 하는 열악한 처지에 놓였다.1923년 서해안 지방의 이재 동포를 돕는 구제회가 춘천에서 조직됐는데,춘천지역 기생들이 연주회를 열어 후원금 모집에 나서기로 했다는 기사가 동아일보는 1923년 8월 31일자에 났다.‘춘천서도 활동,기생도 연주회’기사에는 9월 6일 공연을 앞두고 굉장한 설비를 준비 중이라고 전하고 있다.노래와 춤 실력을 보유한 춘천 기생들은 1930년 강원전역에서 벌어진 대수재 때도 자선 공연을 준비한 것으로 나타났다.춘천의 각 신문사 지국 공동주최로 1930년 8월 1,2일 춘천공회당에서 수재 구제를 위한 활동사진 상영과 함께 명기 명창이 출연하는 연주회를 열어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재민 후원금을 모으기로 했다는 기사(조선일보 1930년 8월 1일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1937년 7월 일본이 중국 침략 전쟁을 일으키면서 ‘국방연주회’라는 공연이 생겨났다.1937년 9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춘천 각 요리점 주최 국방연주회 개최’기사가 실렸다.춘천의 요리옥 대흥관·금강관 등 요리점 4곳에서 9월 25,26일 공회당에서 기생연주회를 열어 이틀간 수입금은 전액 국방 헌금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국방연주회와 같이 일제강점기 공연 통제와 간섭은 전부터 있어왔다.조선일보 1930년 8월 4일자에 ‘야학 음악회를 경찰이 돌연 중지’기사가 실렸다.통천군 고저항의 수산야학교에서 여름방학을 틈타 겨울철 땔감 구입비를 마련할 목적으로 음악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던 중 7월 31일 돌연 경찰서의 중지 명령을 당한 것.경찰은 서해안에 풍수해가 심한데 향락적 음악연예회는 불온당하다며 중지시켰다.대낭패를 당한 주최측은 경찰서와 교섭했으나 아무 효과를 얻지 못하고 무기한 연기된 사정이 실렸다. 

원문보기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7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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