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김영희 한겨레 편집인] ‘법 기술자’의 시대에 기억해야 할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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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552회 작성일 2023-05-30 10:01본문
공사다망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참여연대와 공방을 주고받았다. “저는, 5년 내내 정권 요직에 들어갈 번호표 뽑고 순서 기다리다가, 정권 바뀌어 자기들 앞에서 번호표 끊기자마자 다시 심판인 척하는 건,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퇴고를 거듭했을 문장엔 참여연대가 시민들의 윤석열 정부 1년 평가를 전하며 제기한 ‘검사 통치’ 문제에 대한 답은 없고 메신저에 대한 비난의 날만 번득였다. 이기기 위해 어떤 방법도 마다치 않는 ‘조선 제일검’다운 방식일까. 야당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변호사 출신 김남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코인 투기 의혹 대응에선 정치인의 책임감보다 ‘법 기술’만 도드라진다.
공직자나 법조인의 품위, 도덕, 책임감 따위는 ‘공자님 말씀’이 된 시대라 할지 모르지만, 얼마 전 기림비 제막식에 참석했던 고 황인철 변호사(1940~1993)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법 기술자’의 기준이라면 황 변호사는 우직하다 못해 한심한 사람일지 모른다. 20여년 변호사 인생에서 재판에서 ‘승소’를 한 사건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1974년 민청학련 재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피고인의 무죄를 확신한다. 그러나 그에게 유죄판결이 떨어지리라는 것도 의심치 않는다. 변호인의 입에서 이런 말이 토로될 지경에 이르면, 도대체 이 재판의 의미는 무엇인가.”
박정희 쿠데타가 있던 1961년 고등고시에 합격한 뒤 전도유망한 판사였던 그는 1970년 변호사로 나섰다. 아내 최영희씨는 “가난한 시골 국민학교 교사 집안의 9남매 장남이었던 남편이 ‘아들이 판사가 됐지만 바뀐 게 없다’는 어머니 편지를 받고 며칠을 울며 고민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가족을 위한 길, 하지만 그는 누구도 변호에 나서지 않는 청년들의 처지를 듣고 동기 홍성우 변호사 등을 설득해 민청학련 사건에 뛰어든 뒤 이돈명, 홍성우, 조준희 변호사와 함께 ‘인권변호사 4인방’의 길을 가게 된다. 70년대 지학순 주교 사건, 김지하 반공법 위반 사건부터 90년대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사건, 윤석양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의 변론 사건은 민주화 역사 그 자체였다.
민주화에 공헌했으니 그를 지금도 기리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길지 않은 53년 삶을 이토록 많은 일로 이끈 힘이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보고 싶다. 그는 평생의 벗인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권유에 계간 <문학과 지성>의 원고료를 대고, 필화 사건에 대비해 편집인을 맡으며 문인들과 깊은 교류를 나눴고, 김수환 추기경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등에서 활약했고, 아들이 자폐증 판정을 받고 나선 집안마다 숨기기 급급하던 당시 처음으로 전국자폐아부모회와 사회복지법인을 만들었으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설을 주도하고, 한겨레신문 초대 감사를 맡기도 했다. 사건으로 인연을 맺은 수많은 이들을 조용히 지원한 사례는 끝이 없다.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이 황인철 변호사의 장례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어려움이 왜 없었겠는가. 정의로운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이들이 모두 선한 것도 아니었을 터다. 시대에 맞선 ‘용기’만큼이나 약자를 향한 따뜻한 마음,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깊은 존중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993년 직장암으로 떠난 그의 장례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그분에게 있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인간 사랑은 불의의 편에 서 있는 사람까지 사랑으로 감싸 안을 만큼 진실되고 모범적인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황 변호사의 강단 있되 비난하지 않고 조용히 호소하는 듯한 변론은 상대방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014년 <조선일보> 기획에서 전직 대법관이 뽑은 최고의 변호사에 그가 꼽히거나, 재조 법조인들이 대거 장례식장을 찾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김병익 선생은 1995년 추모 문집에서 “그는 숱한 불의들과 투쟁했지만 전투적인 투쟁가가 아니었고,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의 앞장에 섰지만 운동가는 아니었으며, 그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적극적인 행동을 스스로 다 했지만 행동부터 앞서는 행동주의자는 아니었다”며 ‘훼손당한 인간의 권리를 위해 싸워오면서도 그 때문에 그의 품성이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온 고결한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10일 대전시 유성구 세동 황인철 변호사의 생가터에 황 변호사의 타계 30년을 맞아 형제 등 가족들과 문학과지성사 등이 뜻을 모아 세운 기림비 모습. 대전/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그는 김재규의 항소이유 보충서를 직접 썼고 수많은 사건을 꼼꼼히 기록했지만, 자료가 뿔뿔이 흩어져 유고집조차 없다. 그 흔한 에세이 하나 쓰지 않았다. 정현종 시인의 조시 ‘‘무죄다’라는 말 한마디’와 김병익 선생의 추모글이 뒤에 적힌 기림비 전면엔 30년 전 막내아들이 그린 아버지 얼굴과 황 변호사의 자필 서명만이 새겨졌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법이 다시 권력의 도구가 되어가고 상대에 대한 존중 없는 ‘법 기술의 정치’가 난무하는 요즘, 많은 말 많은 글보다 삶으로 세상을 적셨던 사람, 그런 사람이 법조인이었다는 사실이 무척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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