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칼럼-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윤석열을 위한 ‘승자의 시간’을 주자
작성일 22-04-0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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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의 시간이 실종됐다. 비정상이다. 전쟁 같은 선거가 끝났으면 대통령 당선인이 무대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한다. 패자는 승자가 국민과 소통하면서 비전과 정책을 완성해 가는 산통(産痛)의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물러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윤석열 당선인과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양측은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과 한국은행 총재 지명, 감사위원 인선 문제로 불협화음을 일으키더니 이제는 배우자를 공격하고 있다.
5년 전 떠오르는 권력이었던 문재인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정권 교체기 인사를 반대했다. 그런데 자기는 퇴임을 앞두고 알박기 인사를 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반발하고 있다. 선거 이후 통합의 에너지를 만들어 전진해야 할 공동체가 분열하고 있다.
김영삼·김대중 협력 최선의 모델
지방선거 앞둔 대결 유혹 이기고
패자가 승자 도울 때 통합 이룰 것
이재명 후보는 대선 과정에서 토론도 더 잘했고, 능력도 더 인정받았다. 상대는 탄핵으로 폐가(廢家)가 된 정당이 외부에서 영입한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 정치 신인이었다.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를 진 결정적인 원인은 문재인 정부 5년의 실정(失政)이었다. 잘하려고 했겠지만 조국을 옹호한 내로남불, 미친 집값과 과도한 부동산 세금에 과반(過半)의 민심이 등을 돌렸다. 이재명은 잘 싸웠지만 정권교체라는 중력(重力)을 못 이겨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국민의 냉정한 평가를 받은 문 대통령은 모든 걸 내려놓고 정권 이양에 협조해야 한다. 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잊힌 삶,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이 선택한 윤 당선인과 대립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아닌 진영의 사령관으로 남으려는 것인가.
민주당의 행태도 이해하기 힘들다. 국민의 선택을 받는 데 실패했으면 먼저 반성하고 쇄신하는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패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송영길 대표는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약속했던 ‘586 용퇴론’은 어디로 갔는가. 명분도, 염치도 없는 행동에 같은 당 의원들까지 집단 반발하고 있다.
선거 때 원내대표였던 윤호중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이 된 것도 쇄신을 거부하는 자세다. 이제는 이재명 후보의 조기 정치 복귀설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윤석열 한 사람을 위한 무대에 세 사람이 올라가는 셈이다. 6월 지방선거가 대선 연장전으로 치러지면 정치적 내전이 일상이 될 것이다.
김대중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바로 그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김영삼 대통령은 라이벌 김대중이 없는 자신만의 무대에서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이라는 강력한 개혁으로 집권 초반에 83%의 고공 지지율을 누렸다. 김대중을 찍었던 호남도 압도적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지지했다.
김대중이 1995년 정계에 복귀해 네 번째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을 때 김영삼은 그를 겨냥한 검찰의 비자금 수사 유보를 결정했다. 결정적인 장애물을 제거해 준 것이다. 1997년 12월 18일 대선에서 김대중이 이회창에게 승리하자 두 사람은 이틀 뒤부터 매주 만나 오찬 회동을 했다. 첫 회동 사흘 뒤인 12월 23일 양측 동수(同數)의 ‘12인 비상경제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현직 경제부총리, 외무부 장관, 통상산업부 장관, 대통령 경제수석, 총리 행정조정실장, 한국은행 총재가 정부 측 멤버였다. 인수위보다도 먼저 만들어져 사실상의 경제 비상내각 역할을 했다. 이 기구를 통해 김대중 당선인은 IMF 외환위기 속에서 국가부도를 막을 수 있었다.
김대중 당선인의 인수위와 김영삼 정부의 재정경제원은 추경(追更) 예산도 공동으로 추진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당선인에게 사실상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협조했던 것이다. 최선의 정권 이양 모델이었다.
이재명 후보는 대선에 패배한 직후인 3월 10일 윤석열 당선인의 전화를 받았다. “너무 잘 됐다”고 축하하면서 “진짜 꼭 성공한 대통령이 돼 달라”고 했다. 윤 당선인이 “민주당이 과반 의석인데 이 후보님이 도와줘야지…”라고 하자 “내가 모든 힘을 다해서 돕겠다. 우리가 경쟁한 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냐”고 했다. 이 후보가 “선거 때 마음을 거슬리게 한 거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윤 당선인은 “그거야 내가 더했지요”라고 했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훈훈한 대화였다. 172석을 가진 거대 야당이 정치 초보 당선인의 성공적인 출발을 도와주면 국민은 발 뻗고 잘 것이다.
지금은 5년간 국정을 책임질 윤석열 대통령의 시대를 준비하는 황금 같은 시간이다. 문 대통령은 객석으로 내려와야 한다. 민주당도 지방선거를 대선 연장전으로 몰고가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대결의 정치를 끝내면 국민이 높이 평가할 것이다. 승자도 아량을 보이고 통합과 협치에 나설 수 있다. 이제는 윤 당선인이 국민과 함께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춤출 차례다. 거대 야당으로서 비판과 견제는 당연하지만 천천히, 두고두고 하면 된다. 먼저 승자만의 시간을 허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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